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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선생과 초의선사의 금란지교

by 무량화 Mar 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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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거처였던 별채 모거리
안채인 안거리


한겨울이라도 그닥 춥지 않은 서귀포라 들녘 어디나 지천으로 퍼진 야생 수선.


파내고 파내도 솟아나 농촌에선 천덕꾸러기다.

때마침 수선화 만개한 철이라 추사유배처를 찾았다.


변에서부터 한들거리며 피어난 토종 수선화 대정에 닿으니 얼마든지 마주할 수가 있다.

제주도에선 이렇듯 외출하기만 하면 매번 온갖 꽃 만발, 흔감스런 선물을 한아름씩 받곤 한다.

한라산 봉우리는 은관을 쓴 듯 눈 쌓여 하이얗듯 서귀포는 봄날씨라도 눈발 휘날리기 예사다.


따라서 눈 속에 피는 설중수선이다.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一點冬心朶朶圓)/그윽하고 담백하여 감상하기 그만이다(品於幽澹冷雋邊)/매화나무 고고해도 뜰 밖 나기 어렵지만(梅高猶未離庭砌)/맑은 물에 핀 수선화 해탈신선 너로구나(淸水眞看解脫仙)

충남 예산의 김정희 종가 유물 중 하나인 추사의 칠언시 ‘수선화(水仙花)’는 보물 제547호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접하는 탁본 속 수선화부(水仙花賦)는 아깝게도 중국 청나라 호경(胡敬)의 시를 옮겨 적은 것이다.

눈서리 찬 깊은 겨울에도 변치 않는 선비의 지조와 청렴을 수선이 상징하듯, 추사의 세한도야말로 의미 자못 유현해 그 경지 짐작하기 쉽지가 않다.



제주박물관에서 진본 세한도를 처음 보고 놀란 것은, 그간 단지 세필로 그린 자그마한 수묵화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 겨울이 되어 날씨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 푸름 잃지 않음을 안다는 의미의 그림.

바로 옆에 제자 이상직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낸 글이 딸린 거야 당연하다.


외로운 섬에 귀양 간 추사에게 제자 이언적은 북경에 다녀올 적마다 귀한 서적을 구해 제주로 보냈다.

이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붓을 들어 네 그루의 나무와 집 한 채를 화폭에 담았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는 뜻의 세한도였다.

어려운 처지가 된 자신을 잊지 않고 머나먼 중국을 다녀올 적마다 귀한 책들을 구하여 바다 건너 적소까지 수차 보내준 이상적이다.


우측의 늙어 기울어져가는 소나무를 왼쪽 젊은 소나무가 받쳐 주며 더불어 곧게 서서 간결한 집의  배경이  그림.

추사는 그림 왼쪽에 적혀있는 해서체의 화발(畵跋)에서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적어 보냈다.


이에 감읍한 이상적은 이 그림을 받고 무척 귀히 여겨 자신이 또다시 중국 가는 길에 세한도를 갖고 가 중국의 여러 학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이상적과 김정희 간의 인간적인 의리에 감동하여 그림 끝부분에 자신들의 느낌을 덧붙여 나갔다.

당대의 뛰어난 중국 학자 13인과 한국인 세 명이 단 발문이 줄줄 달려있어서 그 길이가 무려 10m 넘는 길고 긴 두루마리 형태인 세한도다.

발문을 단 한국인 세분은 누구나 익히 알고 존경하는 민족사학자 정인보 선생,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형 박사,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이었다.



여러 번 보아온 전시물이라 건성으로 전시실을 돌던 중,  끝 방에서 감사하게도 뜻밖의 행운을 만나게 되었다.


특별기획 전시회가 아님에도 그렇게 이번에 새로운 기획 공간을 접하게 됐던 것.


작년 말에 열렸던 제주 추사관 기획전이 계속 이어진 덕분이었다.


주제는 추사선생과 초의선사의 사십 이년에 걸친 깊은 우정과 유대를 이어온 금란지교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각기 다른 길을 걸어온 두 거장.


그럼에도 서로 문화예술적 교류를 통해 금란지교를 가꿔왔던 따사로운 인간적 면모가 전시실에서 은연중 배어 나왔다.


추사로부터 스물 두통의 편지를 받은 초의는 입적을 하며, 이승의 모든 것 다비를 시켰을 텐데 추사체의 가치만은 불사를 수 없었나 보다.


백아와 종자기같이 교유하며 서로를 알아보고 상대를 알아주는 관계, 학문과 철학을 공유하면서 더불어 인생을 논할 수 있는 붕우 아니었으랴.


그야말 두 어른 공히 막상막하요 백중지세다.


화로 하나가 있는 다실 ㅡ일로향실.


1841년 유배 중에 추사가 초의선사 거처인 일지암에 써서 보낸 현판 글씨다.


오래전 남도여행 중에 들렀던 두 칸짜리 단출 소박한 일지암이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차를 유독 아낀 추사는 다도의 대가인 초의선사와 평생을 교류하며 제주지역에 차나무를 심는 등 차 문화를 도입한 선구자였다.


일지암과 지근거리인 보성 다원과 함께 제주 오설록이 녹차밭으로 자리 잡게 된 뿌리는 초의선사와 추사선생으로부터 시원된 게 아닐까.


당연히 적소 주변에도 낮으막한 차나무가 탱자나무 생울타리 아래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세한도와 이 마을 골목 어느 집 담벼락에 그려진 수선화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테고,


풍사실이란 현판 뜻은 마음이 넉넉한 선비가 사는 방이라 한다.


탑광실은 부처님의 은덕이 있는 방이란 뜻이며 예산 화암사 중창에 맞춰 써 보낸 무량수각 편액은 현재 수덕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행서체로 쓴 홍도촌사 탁본은 서로를 그리는 집이란 의미, 여균사청은 푸른 대나무와 같은 청렴함을 말하며 추사가 평소 누구에게든 훈계의 뜻으로 써준 글귀다.


공산무인 수류화개는 빈 산에 사람은 없는데 물은 절로 흐르고 꽃도 절로 핀다란 뜻으로 법정스님이 생전 거처를 수류화개실이라 칭했다.


육영당은 영재를 길러내는 집이란 이며 시례고가는 시와 예의 고풍이 흐르는 집이라고.


맨 아래 머무를 유 집 재 유재는 추사의 제자 남방길의 호로, 남김의 정신을 강조하고자 지어줬다고 한다. 


천개사경편은 자연의 한적한 정취 읊은 한시를 부채 글씨처럼 펼쳐 썼으며 의문당은 대정향교 유생들 공부방에 내렸던 현판이다.



추사 가계도를 살펴보니 정말로 어마어마한 집안 맞다.


증조모는 영조가 가장 귀애했던 화순옹주였으며 아버지 김노경은 공조 예조 이조 병조판서를 두루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추사 자신도 효명세자의 사부를 지냈으며 흥선대원군도 초년에는 그의 문하생이었다.


한마디로 한양에서도 내로라하는 막강한 힘을 지녔던 쟁쟁한 가문의 사대부로 소년기부터 시서화에 두루 능했다.


김정희는 24세 때 부친이 동지사 겸 사은사의 일행으로 중국에 갈 때 그도 부사(副使)인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직책으로 따라갔다.


이때 연경에서 첨으로 본 수선화에 혹해 뇌리에 각인돼 있던 중, 후일 중국을 다녀온 사신이 수선 뿌리를 선물해 이를 가꿨다니 한눈에 제주 몰마농이 수선화임을 알아봤던 것.


천대받던 제주몰마농을 화려하게 부활시킨 추사는 적소에 수선을 가꾸며 여러 시화를 남겼다.


유형지에서 송강 정철, 서포 김만중, 다산 정약용 역시 엄혹한 고뇌 속에서도 찬연히 빛나는 유배문학을 꽃피웠더랬.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드라마로 잘 알려진 '현산어보'를 남겼고.

여기서 다산은 추사체를 완성시켰으며 국보 180호로 지정된 문인화 세한도를 그렸다.

또한 7년간의 유배 기간 동안 제주지방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쳐 사회교육 면에서 크게 공헌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과 이조참판 자리에 있었다.

헌종 6년, 55세 되던 해에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청나라로 떠나려던 중 외척세력의 배척을 받아 제주도로 밀려났다.

유배처였던 강도순 가옥은 밖거리(바깥채), 안거리(안채), 모거리(별채)와 대문채로 구성된 전통적인 제주 가옥이었다.

그는 밖거리로 유생들을 불러 모아 교육을 시켰는데 '추사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는 말처럼 여기서도 많은 제자를 길렀다.

추사는 모거리에 기거하며 유배처에서의 비분강개한 심사를 학문과 예술로 승화시켰다.

유배지가 위치한 대정 현성은 조선 태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고자 쌓은 대정현의 높고 긴 성벽이다.


바로 그 곁에 적소와 추사기념관은 자리했다.


평생에 걸쳐 열 개의 벼루를 밑창 냈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 정도로 치열하게 서도에 천착했기에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추사다.


익히 알고 있듯 추사는 북한산 신라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학 통해 사실로 증명한 고문 판독 분야의 개척자이자 금석학의 대가인 선생이다.


병조판서를 부친으로 둔 명문가 출신이며 일찍이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가나 도중 두 번의 유배생활을 겪기도 하였다.


조선의 고질병인 사색당파 싸움에 연루돼 제주도로 유배와 8년, 또 말도 안 되는 예송 논쟁에 휘말려 함경도 북청에서 삼 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제주 적소에서 조선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인 추사체를 비롯, 꾸밈없이 고담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서권기 넘치는 세한도를 남겼다.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의 호를 쓴 김정희 선생.


노경에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는데 일흔한 살 되던 해 불가에 입문했다가 그해 눈을 감았다.


정조 때 태어나 철종 때 별세, 세상을 뜨기 사흘 전 마지막으로 쓴 글이 봉은사 '판전' 두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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