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울산의 시인 C 선생이 댁 뒤편에 만든 가마에다 가끔 장작불을 넣는다는 얘길 듣고 꼭 한번 찾아뵙고 싶었다. 그분으로부터 받은 시집 서문에 <茶雲窯에서>란 글자가 사뭇 나를 이끄는 자석이었다. 차 나무가 자라고 항상 구름이 머문다는 다운동 기슭.
그러나 아직껏 기회는 마련되지 않았다. 때때로 마음만 동해남부선을 탄다. 그리고 어느 호젓한 산언덕을 주소 하나만으로 찾아 오르곤 하는 상상을 한다. 다행히 C 선생이 가마에 계셨으면 하는 마음을 품고. 만남의 자리에선 자연스럽게 시와 문학에 대해, 가마와 도자기에 관한 얘기가 이어지리라.
그분은 지난해 울산방송과의 인연으로 잠시 뵌 적이 있었다. 손끝으로 가 아닌 마음으로 흙을 빚고 또 글을 빚으시는 분이라서인지 인품 다사로우신 분으로 여겨졌다. C 선생을 뵈면 나는 내 도자기 이야기를 할 참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시간의 그 한끝을 찾아서 오늘에 동여매 보고 싶다. 어쩌면 선생께선 한 가닥 동질의 공감대로 하여 다로에 숯불을 지피실지도 모를 일.
집에 몸체 긴 도자기와 청회색 재떨이가 하나씩 있다. 자랑할 만한 골동품도 아니고 내세울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보면 대수롭지 않겠지만 내게는 아주 소중한 것들이다. 오직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라서가 아니다. 이미 무정(無情) 일 수 없는 그들은 내가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것이기 때문에. 손수 형태를 잡고 디자인 대로 조각을 뜨고 내 맘에 드는 유약을 입히고 불이 사윈 후 초조히 기다렸다가 건져 낸 나의 작품이므로. 말하자면 어린 왕자의 장미꽃과도 같댈까. 그들을 만들 당시. 갓 스물이 지난 청신함은 아마 신록의 숲 향기 같았으리라. 충혈된 욕심, 애증의 갈등 따위도 몰랐으리라.
이천 가마로 도자기 실습을 떠나던 날의 설렘이 문득 가슴에 되살아 난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의 뒤편에 묻힌 기억들이 어찌 아직도 이리 선연할까. 그때, 시외버스 뒷좌석에 앉아 출렁대며 푸른 모자이크로 이어져있는 들판 길을 질러갔다. 이천에 닿았을 때는 정오 무렵이었고 여름 콩밭이 무성했다. 야산 등성이 여기저기 이미 이론으로 낯익은 가마가 엎드려 있었으며 장작더미 높직하게 쌓여있었다.
게서 지낸 일 주간. 저수지 방죽 아래서 라면을 끓여 포장지에 받치고 먹던 기억조차 중하게 느껴지는 그때. 오래 흙을 치댄 다음 형태를 빚고 무늬 새기던 나날이 경탄이었고 종내는 경건함으로 사뭇 조심스럽기조차 했었다. 신묘한 흙과 불의 조화에서 도자기는 빚어진다기보다 가히 신앙이듯 성심 기울이는 도공의 진지한 자세에서 도자기는 태어나는 것. 그들은 결코 예술가 연하거나 장인 정신으로 치장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배어나던 진솔한 예술혼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곳에서 <자매>라 이름 지은 한 쌍의 도자기와 재떨이 한 개를 데리고 왔다. 대학 미전에 선을 보였던 <자매>는 계속 내 곁을 따르다 얼마 전 실수로 하나를 잃었다. 그 바람에 균형을 흩트린 채 오도카니 하나만 남겨졌다. 재떨이는 말 그대로 재를 터는 용구지만 그렇게 사용한 적은 없었다. 물론 담배를 걸 수 있는 흠까지 파진 천상 재떨이나 그냥 높직한 곳에 올려놓고만 본다. 그렇다고 장식품이기엔 너무 밋밋하고 수반으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작다. 허나 가끔 올려다보면 겸손한 빛깔이며 다소곳한 매무새가 되바라지지 않아 좋다. 얼마쯤의 무게감도 경박하지 않아서 또한 미쁘다. 특히 유난스럽지 않은 친구처럼 그저 정물로 내 일상을 말없이 지켜줌이 더욱 좋다.
더러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엉킨 얘기가 길어진들, 좀 수다가 된들 C 선생께선 맑은 바람 같은 표정으로 들어주실까. 꼭 한 번은 동해남부선을 타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서고 싶다.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