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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물-레베카

by 무량화 Aug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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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U6hUizHct8?si=A2SvZhJ4eSC_Cmma

내가 최고로 꼽는 영화는 일편단심 <카사블랑카>이다. 수차례 보았지만 볼 적마다 감동에 빠진다. 그럼에도 한편 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시종일관 그는 상식과 관습을 깨는 작품세계를 추구해 왔다. 제도권 밖에서 번뜩이는 광기와 섬뜩한 야만적 습성들의 총집합물을 찍어낸다는 악평과 함께 아예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에 반해 나는 그가 생것 그대로를 포장하지 않고 그냥 내보이는 직접화법 방식이 맘에 든다. 그런 나를 괴상하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항상 무엇에든 '좋다, 싫다.' 또는 '흑과 백'으로 구분 짓는 극단적 양립 현상을 태생적으로 즐기는 듯하다. 내 방식은 옳고 네 생각은 그르다가 아니라,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해서 절충해 나가는 사회가 아닌가.



한여름 혹서엔 납량물이 땡긴다. 그렇다고 소복을 한 귀신, 악령의 저주,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며 좀비가 설치는 영화류는 사절이다. 요 며칠 주로 호러영화를 보았다. 겁은 많은 편인데 영화를 보면서는 비명을 지른다거나 손으로 눈을 가리고 내숭 떨며 손가락 사이로 보는 식은 아니다. 정 보기 언짢은 장면이면 잠시 눈길을 내리면 된다. 서스펜스 스릴러의 태두로 불리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40년 작품인 <레베카>를 필두로 <나는 고백한다><다이얼 M을 돌려라><사이코> <새>를 연달아 보았다. 명불허전이란 말이 왜 생겼겠나. 조마조마 초조하게 극단의 조바심을 자아내게 하면서 하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게 하고 등골이 오싹한 채로 몰입하게 만드는 흡인력. 그는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데 과연 명수였다. 영화에 담긴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사회적 금기를 짚어보는 재미, 두려우면서 끌리는 공포영화로 여름 며칠을 서늘하게 보냈다.

   

서스펜스 스릴러물을 본다는 것은 남의 집 창문 너머의 부부싸움을 구경하려는 심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다. 히치콕은 대중의 엿보기 심리를 교묘하게 건드리며 관객 역시 합법적인 관음자가 되게 만든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모두는 공범 의식에 빠진다. 위에 모신 영화는 신데렐라의 후일담 같은 <레베카>다. 맨들리 저택의 하녀 덴버스 부인이 오싹하게 지켜보는 숨은 시선만이 아니다. <사이코>에서 노만이 벽에 비밀구멍을 뚫어놓은 뒤 자신의 모텔에 들른 여자 손님의 목욕 장면을 훔쳐본다. 이때 노만의 시선은 완전히 여자를 포위한 채 그녀를 자그마한 원 안에 가두어 두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관음증 나아가 조현증 거기에 강박관념과 죄의식으로 얼룩진 어두운 세계는 단지 노먼만의 것일까?  



히치콕은 평소 말했다. ‘보이는 사물의 외양과 본질은 다르다’는 그의 생각이야말로 정확하고도 지독한 통찰의 산물이다. 인간 모두가 지닌 이중성을 인정한다면 고로 누군가를 하나의 편협한 잣대로만 재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리라. <나는 고백한다>의 신부처럼 외양과 동일한 본질을 만나기도 하나 극히 예외다. <레베카>를 비롯 그의 대부분 영화는 시종일관 다음 장면을 예측불허케 하는 반전의 거듭, 극적인 결말의 또 다른 반전이야말로 감탄사를 터뜨리게 만든다. 어느 순간 자신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는 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의 공포를 보는 것이 더 두렵다는 걸 히치콕은 진작에 간파하였다. 해서 히치콕은 단순히 서스펜스의 거장이라는 불멸의 호칭 외에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읽어내는 심리학의 대가라 불러 손색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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