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촌은 내게 조감도 투시도 같은 건축미술을 공부해 보라고 권하며 드로잉 실력을 키우라 했는데....
한참 전에 돌아가셨지만 당시는 자신만만한 오십 대 한창때로, 승승장구하며 자존감 돛대 같았다.
다혈질 성격에 세상 두려울 게 없었으나 다만 건축계의 선배이자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인김중업 선생만은 어려워했다.
한국 1세대 건축가로 대단한 양반이라며 삼촌이 존경심을 표하는 유일한 분이었기에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일찌감치부터 위상은 익히 들어왔다.
프랑스에서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 삼 년 넘게 도제교육을 받은 그는 귀국해 열정적으로 근대 건축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특히 직선과 곡선을 아우르는 독창적 기법을 구사한 이 작품은 가우디의 구엘공원을 떠올리게끔 한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 최초로 외면을 유리와 강철로 마무리한 최고층 마천루인 삼일빌딩을 완공시킨 주역이기도 한 김중업선생이다.
그 무렵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건축물은 대개 김중업 선생과 김수근 선생 작품들이었다.
부산 살 때 부산대학 본관과 부산 유엔기념묘지 정문이 그분 작품이란 말을 듣고 부러 찾아가 보기도 했다.
기존의 규범을 깬, 기하학적이며 유기적인 곡면은 김중업 건축의 특징이라 평하는데.
아름다운 곡선의 미학이 돋보이는 선생의 작품으로 한국에서도 건축이 비로소 예술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됐다.
오늘의 주인공 '소라의 성'은 묘한 형태의 단일건물로 건축대장도 미비한 데다 건축 설계도가 없는 미스터리한 비밀의 성이다.
하여 근거는 확실치 않지만 유려한 곡선미로 미루어 김중업 선생의 작품으로 학계에선 유추하고 있을 뿐이다.
서울에서 왔다는 건축학도는 소라의 집을 한 바퀴 돌면서 이모저모를 사진에 담고 있었다.
그 학생과 얘기를 나눴는데, 소라의 성은 틀림없이 김중업 선생 작품이라고 단언하며 박정희 당시 대통령 별장이라고 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지척에 이승만 대통령 별장터가 있긴 하지만 여태껏 이 건물의 주인장이나 용도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따지고 보면 그럴싸하긴 하다.
1969년에 지어졌다는데 건축물대장에 소유자의 이름도 없는 비밀 건물이라면?
그즈음 서울에서 한창 삼일빌딩이 올라가던 중이며 한국은 전국적으로 근대화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다.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건축가에게 서슬 퍼런 최고 권력자가 부탁한 청이라면 이쯤이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을 터.
파라다이스 그룹에 매각된 이승만 별장은 아무래도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의 국부 별장이라 창고처럼 초라했으나 소라의 성은 자태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해안절벽에 지어진 아름다운 건축물소라의 성은 검은 현무암 벽체에 하얀 회벽이 강한 대조를 보이는 이층 구조로 모던하면서도 토치카만큼 견고해 보였다.
서귀포 바닷가에서도 최고의 전망터인 자리, 정방폭포를 지나 소정방폭포 바로 옆 주상절리 해안 절벽 위에 자리했다.
눈앞 푸른 바다에 문섬과 섶섬이 동동 떠있고 뒤돌아서면 한라산 백록담이 오롯이 떠오른다.
철썩철썩 우르릉 쾅~벼랑에 부딪는 파도 소리가 신비롭기보다는 무섭게 들리는 위치다.
이 건물을 완공한 지 이태 후, 곧기가 대쪽 같은 선생은 군사 정권의 도시계획 등 국가 정책을 비판했다가 십여 년을 외국에서 떠돌아야 했다.
본디 요코하마에서 건축공부를 하였던 그는 1952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UNESCO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건축가 대표로 참석차 나간 길에 파리에 있는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3년 6개월간 건축 수업을 받았던 인연으로 파리와 미국에서 거주하다 1979년에야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는 기본 틀에 곡선을 차용, 장식적인 요소로 전체구성 및 공간처리를 한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각 면이 제각각 서로 다른 모양을 한 외관을 둘러본 다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현재 서귀포 관광안내소다.
통상 터미널이나 역전 같이 유동인구가 많은 요지에 관광안내소가 있는데 여긴 지나치게 외진 곳인데?
올레길 6코스에 해당되는 길가이나 사무실을 지키는 직원은 하루 몇 사람이나 구경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실내는 어쩐지 안온하게 쉴만한 별장분위기이기보다는 지하 벙커처럼 묵직해 보였는데 현무암 석재가 주는 어두운 느낌 때문만은 아니리라.
전면 통유리부터 세련된 인상을 주었으며 칸 질러지지 않아 너르고도 개방적인 홀 구조에 실내 양편의 둥근 구조물이야말로 퍽 독특했다.
건축학적 지식이나 안목이 전무하니 그저 전면 창가에 서서 전망 좋은 경치만 좌우로 감상한 뒤 이층으로 향했다.
엷은 크림색 벽에 여기저기 창이 나있는 이층은 서귀포시에서 북 카페로 쓰고 있다.
내부 구조를 고쳤을 리 없을 텐데 아늑한 방 같은 건 없고 이곳 역시 탁 트인 홀이다.
남창으로는 섶섬 문섬이 마주 보이고 입구 쪽 북창으로는 백록담이 선명히 드러났다.
눈 아래 소정방폭포 숨겨진 절벽 품섶과 정방폭포로 연결되는 주상절리대가 내려다보였다.
이층에서도 파도치는 소리는 또렷이 들렸다.
옥상으로 오르는 문은 개방되지 않았는데 한층 더 올라가나 여기나 전부 조망권은 끝내주겠다.
에어컨 팡팡 돌아가는 쾌적한 환경에서 서너 명이 느긋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피서 겸해 슬슬 슬리퍼 끌고 내려와 남은 여름 독서삼매에 잠겨보기로 하고, 곧 여섯 시가 되므로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 천천히 소라고동 속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