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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김과장 Apr 17. 2024

17일차. 왕할머니

12살 이후 나에게 친가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외가와만 왕래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첫 손주였던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다. 부모님의 이혼 이후에는 더더욱 안쓰러워 하셨다.

우리 엄마는 삼남매 중 맏딸이다. 맏딸이 혼자 일을 하며 사춘기의 딸을 키우는 게 얼마나 안쓰러우셨을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시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27살때 돌아가셨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가 가서 할아버지를 부르면 환하게 웃으시던 게 기억난다. 중환자실에서 내 손을 꼭 잡아주시던 것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게는 외할머니만 남았다. 지방에 살고 계셔서 자주 뵙지 못했지만, 외할머니께 전화를 자주 했었다. 


외할머니는 이제 90세가 되셨다. 귀가 좀 어두워지고 깜빡깜빡 하시긴 하지만, 같이 여행도 다닐 정도로 정정하시다. 하지만 할머니는 혼자 외출을 못하신다. 집을 찾지 못해 몇 번 헤매신 후로는 집 안에서만 계신다. 다행히 외삼촌네가 할머니를 모시고 있지만, 할머니는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작은 방안에서 할머니는 1년 365일은 혼자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내가 아이를 낳고 2년쯤 뒤,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졌을 때 외할머니는 증손주를 보러 서울로 올라오셨다. 할머니는 몇 십 년만에 보는 아기였을 터. 너무 신기해하시고 기뻐하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1년에 2~3번씩 우리집에 오셨다. 남편의 무던한 성격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오시면 2~3주씩 우리 집에 계셨다. 그리고 늘 말씀하셨다.


"여기 오면 사람 사는 것 같아. 아기도 보고. 웃음도 나고. 말할 사람도 있고."


할머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그 이후로 할머니, 엄마, 나, 딸과 함께 4대 여행을 추진했다. 4대가 사진도 같이 찍고 여행도 다녔다. 노인과 아이를 데리고 하는 여행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할머니의 웃는 모습과 아이가 신나하는 모습을 보면 내 몸이 조금 힘든 것 따위는 금세 잊어버린다. 4대가 함께 다니면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기도 한다. 그럴 땐 뿌듯하기도 하다.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로 할머니를 '왕할머니'라고 알려주었다. 지금도 아이는 내가 할머니와 통화를 하면 옆에서 조잘거린다.


"왕할머니! 놀러와!"


왕할머니가 놀러오면 딸도 좋아한다. 할머니와 화투패를 맞추고, 귀가 잘 안들리는 할머니에게 큰소리로 종이접기도 가르쳐주고 입에 과일도 넣어준다. 그래서 할머니는 서울로 올라오는 날만 기다리며 사시는 것 같다.  할머니는 딸의 딸의 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실까.


오늘 6개월 만에 할머니가 서울로 올라오셨다. 내 아이는 유치원도 안 가겠다고 하며 들떠있었다. 나는 퇴근길 케이크를 사서 갈 생각이다. 남편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꽃을 사온다고 했다. 아이가 할머니와 사는 것도 분명 장점이 많다. 증조할머니까지 같이 지내는 일은 드물 것 같은데 내 아이는 증조할머니와도 잘 지내고 있다. 


남편에게도, 아이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크다. 오늘 퇴근길은 행복한 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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