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행운 1
가나자와[金沢]에서 두 량짜리 전철을 타고 고마츠[小松]로 향했습니다. 고마츠역에는 도착할 시간에 맞춰 방문하게 될 가마에서 누군가 마중을 나올 예정이라 초행길이고 혼자였지만 전혀 걱정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지긋이 나이가 드신 자상한 인상의 가마 대표님은 초면인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서로 명함을 주고받고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곧바로 대표님의 차에 올라탔습니다. 가나자와는 처음이냐고 물으시길래 두 번째라고 했습니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냐고 물으시길래 가나자와로 돌아가 쿠타니야키[九谷焼]를 둘러볼 예정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어 전통적인 쿠타니야키가 아닌 젊은 감각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을 찾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심플한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짧은 담소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차는 가마에 도착했습니다. 시골 풍경이 고스란히 담긴 길고 가느다란 창문가를 향해 일렬도 놓인 작업대에는 7,8명 정도의 작가들이 각자의 작업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들의 등 너머에 서서 섬세하게 도자기를 빚는 손놀림을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간간이 대표님이 작업 중인 작가를 소개해주셨고, 지금 만들고 있는 작품에 대한 설명도 해주셨습니다. 작업실 건너편에 있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며, 구석구석을 안내받으며 생생한 현장을 둘러본 후, 2층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작가들의 작품 중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골라 그 작가에 관한 간단한 질문을 하자 바로 1층에서 작업 중인 작가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렇게 작품을 사이에 두고 작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고른 쿠타니야끼의 작품들은 신생 작가들이 압도적이었습니다. 다음 달에 도쿄 전시회가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모든 작품은 주문 후 제작으로 보통 2,3개월이 걸린다는 것과 간략하게 신규 거래 조건에 대한 설명으로 대략 일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대표님은 시간이 괜찮으면 근처의 도예 공방을 함께 돌아주시겠다 하셨습니다. 너무 기뻐서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다시 드렸습니다. 그렇게 대표님의 가마에서 일을 하다 독립한 작가들의 작업실을 서너 곳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첫번째 행운이였지요.
#행운 2
두 번째 행운은 마지막으로 찾아간 작가, 그 작가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 작가님의 작업실 풍경은 사진에 담지는 않았지만 눈을 감으면 고스란히 그 풍경이 펼쳐지도록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습니다. 어느 한적한 숲속 마을의 아담한 집 앞에 대표님은 차를 세웠습니다. 제가 심플한 그릇을 좋아한다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셨는지 이 번에 보게 될 작가가 그런 스타일이라 하시며 굉장히 실력이 있는 작가라 덧붙였습니다.
벨을 누르자 반바지 차림의 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대표님과 서로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나누는 걸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다 두 분의 이야기가 멈추었을 때 처음 뵙겠다고 정중히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안내에 따라 작업실로 들어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작업실의 모든 풍경이 너무나도 낯이 익었습니다. 언제가 와 본 적이 있는 것처럼요. 먼저 한 쪽 벽면의 미닫이문을 열며 이곳이 그릇 진열장이라 하셨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완벽한 보이지 않는 수납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자기를 빚는 곳으로 안내해주셨습니다. 그곳에서 나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건 창밖 풍경이었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정사각의 반듯한 창문, 그 창문 너머로 눈부시도록 푸른 6월이 흘러내렸습니다. 하얀 창문 틀에 나란히 놓인 조약돌, 가지런히 정리된 창문을 향한 작업대, 심플하고, 청결하고, 따뜻하고,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모조리 모아놓은 듯했습니다. 거기에 특유의 적막까지 더해져 그건 말하자면 막연히 꿈에서 그리던 가장 이상적인 공간을 현실에서 만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공간, 작가, 작품 이 세 가지가 일치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눈 후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내가 언젠가 책에서 본 적이 있는 풍경이라는 것을. 작품이 좋아서 메일을 보낸 적이 있지만 답장을 받지 못해 마음을 접어두었던 것도. 그리고 전시회 스케줄이 5년 이후까지 잡혀있어 지금은 컨택을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요. 그런 작가의 작업실에 내가 있었습니다.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준 대표님과 작가님은 30년이 넘는 인연이라 했습니다. 작가님이 처음 도예를 시작한 것이 대표님의 가마였던 거죠. 그 어떤 행운이 나를 이곳까지 이끌었는지 나는 그 공간에 있는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그 순간을 모조리 마음속에 담으려 애썼습니다.
그렇게 무언가에 잠시 홀린 듯 몽롱해진 내게 대표님이 말을 걸었습니다. [생선요리 좋아하세요?] 나는 얼떨결에[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은 작가에게 대표님이 물었습니다. [괜찮으면 한잔하러 갈래?] [좋죠!] 작가님이 대답했습니다. 다시 대표님이 내게 물었습니다. [스케줄 괜찮으면 같이 가실래요?] 내 입에서는 대표님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와버렸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대표님의 차를 타고 가나자와로 향했습니다.
#행운 3
대표님과 작가님, 엄밀히 말하면 대표님도 도예가시지요. 그러니까 도예가 두 분과 함께한 소중한 저녁시간, 그것이 바로 세 번째 행운이었습니다. 깔끔한 스시집으로, 운치 있는 바로, 맛있는 이탈리안으로 대표님의 단골집들로 우리를 안내해주었습니다. 음식은 맛있고, 분위기는 멋들어지고, 이야기는 깊이 있고 너무도 멋진 가나자와의 밤이었습니다. 한국 도자기 이야기며, 각자의 도예에 대한 가치관이며, 도예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며, 어떻게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며, 너무나도 흥미 넘치는 이야기들에 정말이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몰랐습니다. 여러 생각을 하게 했고,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모처럼 만에 오를 데로 오른 술기운도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살짝 달아오른 술기운으로 소소한 농담도 주고받았습니다. [다음 생에 만나면 긴자의 오래된 재즈 바에 모두들 함께 가요!] 대표님이 말했습니다. [다음 생에 만나면 다시 함께 오늘처럼 술을 마셔요!] 작가님이 말했습니다. [다음 생에 만나면 저에게 가장 먼저 작가님의 전시회를 열 기회를 주세요!] 내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내일이면 기억이 날지도 안 날지도 모르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술자리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한 행운의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