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텔라 황 Apr 10. 2024

프롤로그: 나의 환자다. 아니, 나의 아기다.

병원에서 환자를 '나의 아기'라 부르는 유일한 곳, 신생아중환자실

“엄마가 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지?”

브라이언Brian의 연한 갈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기를 구해요.”

전혀 주저하지 않고 답한다. 마치 내가 ‘브라이언, 몇 살이지’ 하면 ‘세 살이요’ 하는 것처럼. 거짓이 없는 사실을 말한다는 듯이. 아니 오직 그것만이 브라이언이 아는 진실이라는 듯이.

“엄마가 어떻게 아기를 구하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사랑스러운 두 눈으로 저 멀리 뭔가를 한참 바라본다. 그러다 오래 찾던 최애 장난감을 찾은 듯한 눈빛으로 말한다.

“마스크를 껴요.”

작은 두 손은 이미 귀를 둘러싸고 있다. 마스크를 귀에 사뿐히 걸치듯.

“그다음에는?”

“안경을 껴요.”

손으로 동그랗게 안경을 만들며 아이는 이미 신이 났다.

“그리고?”

“아기를 안아요.”

곁에 있던 공룡 인형을 꽉 안으며 외친다.

“그 뒤엔?”

“계속 안아요!”

대답하면서도 점점 신이 나는지 이제는 아예 인형을 안은 온몸을 덩실덩실 흔들며 흥을 표출한다.


지금 보다 조금 어렸던 세 살 브라이언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가 병원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왜 일하러 나가야 하는지. 왜 엄마를 이틀씩이나 못 보는 날이 있는지. 왜 밖이 깜깜해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아니 어떻게 아기의 생명을 구하는지 제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아기를 실제로 그리고 마음으로 사랑으로 보듬어 안아서 구한다는 것을.


보통 의사들은 ‘환자’라는 말을 달고 산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는 자주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대부분 ‘아기’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내원한 환자는 어젯밤에…”

가 난무하는 병원의 일상적인 대화가 신생아중환자실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000 호실에 있는 네 아기말이야…”

“어제 인공호흡기 단 내 아기가…”

라고 시작하는 일과가 대부분이다. 모두 그렇게 말한다. 

‘내 아기.’ 


“네 아기 어때?” 

라고 물으면 

“집에 있는 내 아기 아니면 여기 있는 내 아기?” 

하고 되물을 때도 있다. 둘 다 모두 ‘내 아기’니까. 물론 내가 직접 낳은 아기는 아니지만 희한하게도 내가 만지는 순간, ‘나의 아기’가 된다. 


이 작은 신생아중환자실 안에는 수 억 개의 미래를 담은 우주가 들어차 있다. 각기 다른 엄마와 아빠의 사연으로 빚은 별이 태어난다. 반짝이고 있지만 이미 죽어버린 별도 있고 가까이 있어 밝은 시리우스 같은 별도 있다. 태어난 아기를 중심으로 돌다 지친 달이 사라질 때도 있다. 반짝인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가버린 별을 세다 잠이 드는 밤도 가끔 있다. 별이 사라지면서 내 안의 한 부분을 함께 가져가기도 한다. 가까이 있던 별이 져서 어둠이 짙어지면 주변의 가족도 그리고 나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그 안에 갇힐 때도 있다.


가끔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혹한 일을 마치고 나면, 약간의 후회도 몰려온다. 이 일을 선택함으로써 감당해야 하는 짐이 버겁게 느껴진다. 고백건대, 아주 가끔 그만두고 싶어 진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아픔의 적정선을 이미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기’ 그리고 ‘가족’ 때문이다.  


세상엔 많은 의사가 있다. 나도 그중 단 한 명일 뿐이다.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그저 그런 의사일 수도 있다. 인간이기에 실수도 한다. 다만 항상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사랑을 모아 아기를 돌본다. 환자의 몸만 치료하는 여느 의사와는 달리, 환자와 가족의 마음까지 보듬어주고 싶어 하는 의사임이 확실하다. 비록 부족한 의술인지는 몰라도 아기와 가족을 위하는 성심만은 모자라지 않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기가 죽지 않도록, 아기의 미래가 있을 수 있도록, 그 미래가 조금 더 밝을 수 있도록. 마치 이 아기가 자라나 온 인류를 구하는 영웅이 될 것이라는 듯이. 영웅이 되지 못하면 어떠랴. 이 아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영웅’ 일 테니. 또 평생 ‘나의 아기’ 일 테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