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살아있음은 기적이니까요
‘OOOO 학교’
경쾌하게 울리는 전화기에 뜬 발신지자. 큰 아이, 벨라가 다니는 초등학교다.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보통 큰 사고를 치거나, 아이가 아프거나, 학교를 빼먹지 않는 한 전화 올 일은 없으니.
“네, 안녕하세요. 벨라 담임, 데이비슨 선생님입니다.”
처음으로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가 먼저 오다니. 큰 사고를 쳤음이 분명했다.
선생님은 말을 이어가는데 도무지 들리지가 않았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무릎 꿇고 사죄하기 시작했다. 죄목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엄마라면 사과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
“벨라를 처음 맡아서, 부모님이 어떤 부분에 집중하고 싶은지 궁금해서 전화드렸습니다. 보통 다른 부모님들은 읽기나 산수에 더 신경을 써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오, 이 선생님 최고다. 보통 학기 중반이나 되어서야 의무적으로 상담하는데, 학기 시작하자마자 전화를 다 주시고! 그나저나 우리 벨라, 사고는 안쳤구나.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쁨이 젖어 둥실둥실 기쁨의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학업에는 솔직히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도 그렇게 답하면 이상한 또는 무심한 학부모로 보일까 될 것 같아 최대한 돌려 답했다.
“학업적으로는 크게 걱정하는 바는 없고요. 단지 벨라가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면 좋겠어요. 잘 배려하고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한 친구를 기꺼이 돕는 아이였으면 해요.”
“제가 보는 벨라가 딱, 그런 아이예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이었다. 어쩐지 최고의 아이를 가진 엄마가 된 것만 같았다. 비록 내가 크게 기여한 바가 없더라도 왠지 누군가 나에게 ‘올해의 엄마 상’을 준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레지던트 때부터 시작해 교수가 된 이후에도 죽음을 항상 나를 따라다녔다. 태어나자마자 한 번 울어도 보지 못하고 죽는 아기들, 건강하게 잘 크다가도 암이나 유전병으로 갑자기 죽는 아이들, 분명히 아침에 웃으면서 학교에 갔는데 뇌사 상태로 병원에 누워있는 아이들. 책이나 영화, 뉴스에서만 보던 슬픈 일들은 내 눈앞에서 너무 자주 그리고 더 잔인하게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기에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
나도 내가 사랑하는 아이도 당장 오늘, 내일 죽을 수 있다. 물론 다른 부모처럼 벨라와 브라이언도 공부나 운동을 잘하고 성격까지 좋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하지만 그 기대로 아이들을 힘들게 한다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오로지 내 욕심으로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사교육이 적은 미국이라지만, 주위를 보면 사립학교에, 과외에, 운동 코치까지. 무척이나 다양한 사교육을 시킨다. 그와 반대로 벨라는 방과 후 활동으로 테니스나 종이접기 클래스를 본인이 원해 시킨 적만 있다.
고백하건대 강남 8 학군의 엄청난 교육열을 정면으로 맞으며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를 마친 금요일 오후마다 피아노, 성악, 글쓰기, 산수, 그리고 사고력 키우기 수업까지 가야 했다. 학원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밤 11시였다. 그 당시에는 토요일 아침에 학교를 가야 했기에, 무척이나 고달팠다. 그래서 성인이 되기 전, ‘불금’을 누리기 전까지는 금요일을 가장 싫어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육에 더 반감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죽고 절규하는 부모를 너무 많이 마주쳤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웠다. 가끔씩 아이들에 대한 욕심이 솟구칠 때마다, 나 자신을 다독여 주려고 한다.
‘지금 아이가 살아있잖아. 그리고 행복하잖아.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겠어?’
그렇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아이가 살아있기만을 원할 것이다. 그뿐일 것이다. 살아 있는 아이.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이 아닐까. 아이가 본연의 모습대로 자랄 수 있게, 내가 아이가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 사랑으로 키우고 사랑으로만 바라봐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부모의 몫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