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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아 Apr 30. 2024

인라인 스케이트와 봄

올리브그린을 닮은 너란 아이

   "와! 인라인이다! 앗싸"


   막내딸이 택배 상자를 열고 나서 소리를 지른다. 제법 부피가 큰 상자 안에 올리브색 인라인스케이트와 보호장구가 놓여 있다. 오래전부터 갖고 싶어 하던 인라인스케이트를 드디어 구매한다. 어린이날에 맞추어 깜짝 선물을 하려 했으나 며칠 앞당겨 주문한 것이다.


   그것을 알고 딸은 며칠 전부터 오매불망 기다린다. 인라인스케이트가 오기까지 하루하루 손가락으로 남은 일수를 세기 시작한다. 저녁밥을 먹을 때마다 며칠 남았는지 다시 확인한다. 손꼽아 기다린 나날이 어느새 며칠 앞으로 줄어든다. 오는 줄 꿈에도 모르고 있다가 문 앞에 놓인 상자를 열어 본 순간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다.    

  

   바퀴가 안전한지 나사를 꼼꼼히 살피고 나서 신겨 본다. 처음 신는 바퀴 달린 신발이 무척 마음에 들었나 보다. 도무지 벗질 않는다. 보호장구까지 착용하여 매트 위에서 내내 동동거린다. 언제 나가느냐고 성화다. 우선 기본자세를 잘 알아야 했기에 전문가의 손을 빌린다.

   유튜브 영상 속에서 알려주는 대로 서기, 앞으로 가기, 안전하게 넘어지기 등 기본자세와 주의사항을 부지런히 따라 한다. 잠자기 전까지 내내 신고 있다가 침대 옆에 벗어 두고 잠이 든다.      


   다음 날 트랙이 있는 운동장으로 향한다. 벤치에 앉아 보호장구를 먼저 착용하는데 이것도 진땀이 난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헬멧까지 쓰면 출동 준비 장착 완료다. 올리브그린 헬멧이 나무의 색감과 어울리어 너무 예쁘다. 동그란 얼굴이 배시시 귀엽게 웃고 있다. 어제 매트 위에서 조금 연습했으나 처음 신고 달리는 거라 조마조마하다.      


   빨간 트랙을 밟고 서 본다. 오! 웬걸 미끄러지지 않고 제법 잘 선다. 몸의 균형을 맞추는 게 신통하다. 다리를 약간 벌리고 팔을 앞뒤로 휘저으며 앞으로 나간다. 나는 뒤에서 졸졸 쫓아간다.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에 맞추어 같이 돌기 시작한다. 아이의 팔이 흔들릴 때마다 발이 조금씩 나간다. 보폭은 길지 않으나 짧게 짧게 끊어지며 나가는 것이 꼭 스타카토 같다. 음악이 없어도 음악이 된다. ‘사라라락’ 바람이 나뭇잎을 비벼낸다. 아이가 신이 나서 웃는다. 하늘까지 닿은 소리가 ‘까르르’ 내려온다.


   "오! 제법인걸"

또 감탄사가 나온다. 이렇게 균형감각이 있는 줄 몰랐다. 막내라 아기 같기만 하더니 제법 바퀴를 구르는 힘이 제법이다. 트랙을 돌다가 운동하시는 어르신들과 마주한다. 함께 걸으며 아이의 모습을 응원한다. 작은 아이가 여기 있으므로 어른인 우리 세상은 기쁘게 되고 웃음이 난다. 아이가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잡아주려 하신다. 아이로 인해 웃는 시간이 쾌활하다. 아이를 보면 자연스레 진짜 웃음이 나온다.

     



   나도 어릴 때 스케이트가 있었다. 지금처럼 인라인스케이트는 아니고 바퀴 두 개가 쌍으로 달린 롤러스케이트이다. 부모님께서 사 주신 분홍색 롤러스케이트는 그 시절 최대 선물이자 아이들의 보물이다. 4남매 키우시느라 어렵기만 하셨을 텐데 어떤 맘으로 선물하셨을지 상상이 간다. 아끼고 아껴 모아 둔 돈을 내서(당시에는 카드가 없어 미리 살 수 없다) 들고 오는 내내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내미는 상자와 그걸 뜯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는 자체가 즐거우셨으리라. 당시 어린 나는 스케이트에만 눈이 갔다면 지금 그 상황을 마주하니 맞은편에서 웃고 계신 부모님의 흐뭇한 웃음이 같이 떠오른다.

왜 그땐 그게 보이지 않을까? 자식을 낳고 부딪혀 경험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사랑은 보이는 것을 넘어서기도 하나 보다.      


    제일 어린 남동생을 제외하고 롤러스케이트는 3 자매의 놀이터가 되었다. 집을 따라 이어진 도로는 경사가 져 있고 한쪽에 아름드리 호두나무가 있다. 처음에는 평평한 도로에서 한 발씩 옮기는 연습을 한다. 익숙해지니 경사진 도로 위에서 빠른 속도로 내려오기로 한다. 긴장되면서도 내려오는 순간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호두나무는 쭉 미끄러져 내려오고 나서 높아진 속도를 조절하고 안전을 책임지는 방패막이다. 한쪽 앞발에 브레이크가 달려 있으나 무릎을 구부려 앞발로 멈추기엔 익숙지 않았다. 호두나무에 손을 갖다 대면 빠른 속도를 어느 정도 멈출 수 있어 연습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스케이트는 하나라 동생들이 "나도 탈 거야, 다음은 나다." 서로 입을 삐죽거리며 다투기 일쑤다. 결국 순서대로 돌아가며 타다가 두 명이 하나씩 나누어 탄다. 다음 날은 일찍 눈을 떠서 쟁취한 사람 순이다. 주말 아침부터 이러는 아이들이 얼마나 성가셨을까? 부모님에게는 편한 주말도 없이 아침부터 시끄럽게 싸우고 지지고 볶는 우리만세상이다. 스케이트를 들고 냅다 달린다. 타고 놀 도로에서 갈아 신는다.


   멋지게 V 자로 길을 만들고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마무리까지 멋지게 타고 싶으나 현실은 다르다. 경사진 도로를 내달리는 속도를 주체 못 해 그대로 ‘죄악’ 미끄러진다. 엉덩이가 얼얼하고 아프다. 그 모습을 보고 동생이 우습다고 얄밉게 "깔깔 " 거린다.   



 

   벌써 3시간이 지났다. 엉금엉금 걷는 수준이 제법 나아졌다. 딸아이는 도무지 지치지 않나 보다. 쉬어가며 타기를 반복하니 말이다. 발이 땅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에너지는 생각보다 크다. 어디서 충전되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트랙을 돌면서 가만히 보니 나의 눈에 아이와 세상이 같이 들어온다. 하늘은 맑고 자연은 연둣빛으로 물들어 싱그러움이 가득이다. 햇살까지 감아낸 바람이 머물러 상쾌하고 부드럽다. 올리브그린을 닮은 자연이다. 이 자연 안에서 뛰노는 아이가 행복하다. 뒷모습 따라가는 내내 나도 즐겁다. 쓰러져도 일어서며 연습하는 딸아이가 그저 기특하다. 처음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는 성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의 첫걸음이다. 인라인스케이트 하나로 풍성한 시간을 보낸다.      


   "이제 집에 가자. 주말마다 나오자." 이번엔 순순히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신다. 스케이트를 벗으니 발에 열기가 가득하다. 보호장구를 벗고 헬멧까지 벗으니 땀이 흥건하다. 얼굴을 훔쳐내어 땀을 닦아준다. 가장 시원한 바람이 아이 얼굴을 지난다. 가방에 스케이트를 챙겨 들고 집으로 가려는데 아이가 이야기한다.     


   "엄마, 저기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다 가요."

   냉큼 뛰어가는 아이 앞으로 아이들 소리가 왁자지껄 놀이터를 울린다.


   "오. 마이 갓!!!"      


기우뚱! 중심을 잡는 아이
올리브그린을 닮은 자연과 봄을 닮은 아이
제법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 아이의 뒷모습과 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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