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부드러움은 실로 강인함
“세상에나. 어떡하지? 으악!”
당황한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벽 선반을 꼭 붙잡은 나의 손과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아이스링크장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막내를 위해 빙상장을 찾은 우리 가족은 아이의 설레는 마음만큼이나 흥미진진한 하루가 펼쳐질 것으로 생각했다. 청주에 빙상장이 있다고 예전에 들었지만 탈 엄두도 나지 않았고 그리 관심도 가지 않았기에 방문할 일이 없었는데 늦둥이 아이 덕분으로 별 걸 다 해 본다. 내가 어릴 때에는 롤러스케이트장이 전부였고, 눈 내리는 날 언덕 위에서 마대로 엉덩이가 젖을 정도로 썰매를 타고 놀았던 적만 있어서 보통 신발이 아닌 날렵한 칼날 위를, 그것도 정상의 길이 아닌 미끄러운 바닥 위를 내가 지지하고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빙상장은 혼잡한 시내 대학교 근처에 있어 혼잡했었다고 들었는데 몇 년 전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여 청주시시설관리공단에서 직접 운영하여 쾌적한 환경과 더불어 안전이 강화된 분위기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신이 난 아이가 뛰어 들어간다. 문을 열고 빼꼼 들어선 아이가 데스크 앞에서 설렌 표정 가득하니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나는 탈 엄두가 안 나 구경만 한다고 했는데 첫째 딸이 온 김에 함께 하자고 해서 엉겁결에 스케이트화를 대여하게 되었다.
청주시에서 운영하다 보니 입장료와 스케이트화 대여료가 저렴했다. 큰딸은 여름에 이미 이곳에 왔던 경험이 있어 초보인 우리를 잘 안내해 주었다. 반드시 장갑을 착용해야 한다는 큰딸의 말대로 데스크 옆 장갑 판매 부스에서 하나에 1,000원씩 구매하여 빙상장 입구로 들어갔다. 문을 연 곳에 펼쳐진 하얀 빙상장은 생각보다 넓었고 이미 빙판 위를 노니는 사람들이 각자의 스포츠를 즐기며 환호하고 있다. 엉거주춤 발을 못 떼는 사람부터 요란하게 회전을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들어선 입구에서부터 빙상장을 둘러싼 준비구역의 실내 온도가 바깥과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겨울이지만 진정한 겨울이 여기서 펼쳐지고 있다. 준비구역 온도계는 현재 6도를 가리키고 있고 빙상장 안의 온도는 더 아래로 유지된다고 했다(온도는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름에 이곳에 오면 한낮의 더위를 피해 시원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내년엔 반드시 이곳으로 피서를 와야겠다.
구석에 준비된 헬멧을 집어 들고 은솔이와 우리는 각자의 스케이트화와 장갑을 착용한다. 추울까 봐 껴입은 옷이 무색하리만큼 낮은 온도에 한기가 있었지만 딸은 몇 번 달리면 괜찮아진다고 했다. 은솔이는 인라인 스케이트 탄 경험이 전부인데 아찔한 빙상 위에서 걸음을 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스케이트를 탈 때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야 하고 초보자는 제일 끝 난간을 이용하고 선수나 강습자는 중앙을 이용한다고 했다.
주의 사항 안내방송과 더불어 화면으로 보이는 관련 정보들이 이용자들의 안전을 위해 시시각각 띄워져 있고, 주황 조끼를 입은 안전요원들이 상주하고 있어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날렵하게 허리를 숙이고 뒷짐을 지어 마치 동계올림픽에서 보던 스피드스케이팅을 타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감탄했다. 월마다 회원 강습과 함께 초보자도 원하면 시간별로 강습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일단 우리는 강습 없이 초보 코스로 타보기로 하고 빙상장 입구 열림 버튼을 눌러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외마디 비명이 마음속에서 울려 나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보다 더 미끄러운, 생각보다 더 추운, 생각보다 아찔한 공간에 발을 들였다. 경험이 없는 나이 든 성인에 비해 마찬가지로 경험이 없는 9살 아이는 성큼성큼 용감하게 나아간다. 난간도 잡지 않고 이미 한 발씩 미끄러져 빙판을 나아가고 있는 모습에 놀랐다. “맙소사! 나 살려!” 벽면 난간(내가 생각했을 때는 10cm 정도)에 몸을 기대어 깊이 박힌 채 나올 줄 모른다. 난간이 옮기어 주는 것이지 발을 제대로 놀려 움직이는 모양새가 아니다.
다리 전체에 에 힘이 꽉 들어차니 자연스러움은 이미 끝이 났다. 중앙을 활보하는 강습생들과 초보이지만 비교적 잘 타는 다른 사람들을 보니 새삼 부러웠다. 5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이런 도전을 하게 되다니 역시 딸 덕에 별거 다 해 본다고 되뇐다. 장갑과 헬멧이 필수인 이유를 알았다. 원형의 벽은 나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 손과 마음은 벽과 동고동락! 한 치의 떨어짐도 없이 꼭 붙어 나아간다. 간혹 앞의 초보자들이 멈추면 나도 따라 멈춘다. 도저히 먼저 지나칠 재간이 없다.
은솔이는 너무나 멋진 아이다. 인라인의 경험이 있지만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고 얼음 위에서는 더더욱 그러한데 생각보다 잘 타는 모습에 아이들의 스펀지 같은 받아들임은 무궁무진한가 보다. 새로움 앞에서도 주눅 드는 법이 없고 일단 해 본다. 이미 정해진 틀에서 했던 것에 익숙한 어른과 아이들의 흡수력의 차이가 이 정도로 어마어마한지 새삼 느꼈다.
엉거주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그것도 운동이라고 몸에 열이 발생한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니 여기저기 근육통이 시작이다. 넘어지더라도 얼음 위에 오히려 나를 맡겨 두고 온몸의 힘을 빼고 부드럽게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힘이 들어가면 제대로 유영할 수 없다. 마치 물속에서 힘을 빼고 나아가듯 어떤 일에서도 적절한 호흡과 힘을 빼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와 나의 다른 점이 그것이었다. 겁을 먹지 않고 넘어져도 그곳에서 즐길 수 있는 마음 말이다.
김연아 선수는 빙상장을 내 집처럼 거닐며 혹독한 훈련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과정을 포개고 포개 나아간 결과이다. 자연스러움은 딱딱함을 거쳐 둥글게 만들어져야 하고 수많은 자기와의 싸움을 넘어서야 한다. 부드러움 안에 강인함을 배운 이날의 빙상 경험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리라.
아이와 한 바퀴 두 바퀴 도는 동안 처음 들어설 때와 다르게 조금씩 나아가는 나를 발견한다. 처음에 안 타겠다고, 입구에서 구경만 하겠다던 내가 더 신이 나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얀 빙판 위를 제각각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도 서서히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가족, 친구들, 또는 부부끼리 즐기던 함께함이 존재한다. 스케이트는 혼자 타는 것이지만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어떤 나라는 워낙 추운 날씨라 바닥이 얼어 있어 외출할 때 스케이트를 타면서 이동한다고도 하는데 각자의 주어진 환경과 방식에 따라 앞으로 헤쳐 나아가는 방법은 반드시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적절히 힘을 빼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용기는 내가 그곳에서 넘어서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나저나 뭐든 주어지면 되긴 되나 보다. 일단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거기에 익숙해져야 가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