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고 굴려내는 힘은
간밤에 쌓인 눈이 아침을 하얗게 밝혔다. 하얀 눈을 따라 펼쳐진 세상은 소복한 마음을 따라 발자국을 찍는다. 벌써 달려 나간 마음은 창가에 총총 매달려 떠날 줄을 모른다. 새끼손톱만큼 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광경은 바람을 따라 피어진 눈꽃으로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요술을 부리고 있는 것만 같다.
14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바라본 눈꽃 세상은 하얗게 드리워져 이 계절의 묘미를 더하고 있다. 온통 펼쳐진 장관에 마음이 설렌다.
어른이 되면서 눈이 주는 감동은 점차 멀어졌다. 눈이 주는 감성은 이미 어린 시절의 것이라 다르게 다가온다. 도로 상황을 눈여겨보게 되면서 출근 걱정 먼저 하게 되고 녹으면서 흙빛으로 질퍽대는 물기로 인해 옷이며 차며 지저분해지기 일쑤다. 이런 날은 버스로 출근하는 편이 오히려 안전하지만 이미 포화인 버스 안은 공기부터 다르다. 내뱉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시선은 벌써 지쳐 있기에 출퇴근 전쟁은 고달프다. 눈이 내리면 옷깃을 힘껏 여미어 고개를 떨구고 총총거리며 걷는 걸음만으로 이미 주변을 바라볼 새가 없다. 얼른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가 포근해질 휴식을 기다린다.
그런 불편함 뒤로 소녀 감성이 되살아난다. 티끌만 한 감성은 불씨처럼 되살아나 아이와 함께 눈을 그려나가는 또 다른 세상으로 마음을 나누게 된다. 하얀 천사의 이야기가 나무에도, 언 땅 위에도, 벤치에도 살포시 내려앉는다. 눈의 설렘이 뽀얄 만큼 순수함의 빛을 발해 온몸을 깡충거리게 하고 웃음소리가 함박눈만큼 커진다. 모자, 목도리, 장갑으로 무장하여 밖으로 나온다. 아이가 저만치 뛰어가면 눈 쌓인 풍경을 따라 눈이 부시다. 나무에 소복하게 쌓인 눈은 12월의 트리만큼이나 근사하게 걸쳐져 있다. 솜처럼 하얀 마디마디가 나무마다 살포시 놓여 하얀 등을 밝히고 있다. 아이가 길바닥에 철퍼덕 앉아 눈을 만진다. 눈을 뭉쳐 엄마에게 던져대며 연신 즐거워하니 더러워질 옷 걱정에 나부대는 마음이 서서히 녹는다. 아이와 함께 나도 눈을 매만진다. 이렇게 눈을 실컷 만져본 적이 언제였던가!
눈은 말 그대로 아이들 세상인가 보다. 하얀 눈만큼 빛날 일들이 아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하야면 하얀 대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이다. 눈밭에 굴러 젖은 옷이 불편해질 걱정을 미리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젖으면 젖은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지금을 즐긴다.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었다. 손아귀에 뭉쳐낸 한 움큼을 더해 단단하게 더해간다. 한 주먹의 눈 뭉치가 점점 커지기까지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하는 굴림이 있다.
어떤 것이든 꾸준하게 지속해야 하나의 덩이가 완성된다. 중간에 멈추면 덩이는 불어나지 않고 그대로 녹아 없어져 버린다. 눈사람 만들기 하나로 내가 걸어가는 과정 사이사이 일어날 일들 안에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를 알게 된다. 언덕이 있거나 도로의 상황에 따라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리저리 비틀려 틀어지고 흔들리는 일도 있다. 굴러가는 동안 찰싹 붙어가는 낙엽과 나뭇가지 심지어 놀이터 바닥의 여러 오물이 ‘철퍼덕’ 붙는다. 이것이 만약 부정의 것이라면 하얀 마음에 붙어 있는 것을 서슴없이 떼어내면 된다. '탁' 붙어 떨어지지 않으면 애써 생채기를 내기보다 다시 구르고 굴려 새하얗게 만들어간다. 억지로 떼어내기보다 때론 품어가 물 흐르듯 안아감도 필요한가 보다. 만나가는 과정 안에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주어진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바라보는지에 따라 나를 성장시킬 발판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놀이터 주변에 놓인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주워 눈, 코, 입을 신나게 꾸며 주었다. 양손을 벌려 ‘만세’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이처럼 이미 신이 났다. 잎이 넓은 나뭇잎을 올려 모자처럼 씌우면 드디어 완성! 이 계절에만 만나고 이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추억을 또 하나 접어낸다. 나무 위에도, 벤치에도 여전히 드리워진 눈꽃을 따라 즐거워하는 아이 덕에 나도 동심의 하루를 만나간다. 하얀 눈은 소복함을 더하고 있고 발개진 아이 볼을 따라 살포시 안아가는 마음 하나,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그렇게 계절을 난다.
24.12.21. 토요일의 추억을 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