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이 준 깨달음
미국에서 살다 보면 가족 대 가족으로 만날 일이 자주 생긴다. 한국에서는 용건이 있는 사람과만 만나서 어울리는 것이 당연했기에 어지간하면 가족을 동반하는 이곳에서의 모임이 처음에는 꽤나 어색했다. 와이프 지인과의 모임이나 아이의 플레이 데이트의 경우 나와 언어, 인종, 학교, 성장 배경 등에서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사교성이 좋은 분들이라면 괜찮겠지만 나에겐 아무래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가족 모임에선 어른들과 아이들의 공간이 분리되기 마련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은 지하실이나 마루로 몰려가서 게임을 하거나 같이 놀거나. 아무래도 태민이는 자폐로 인한 사회성 결여로 다른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기에,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놀기 전에 나나 와이프가 태민이의 자폐에 대해 설명해주고 양해를 구한다. 큰 아이들의 경우는 쉽다. 그동안 학교에서 장애가 있는 친구들을 접한 적도 있고 자폐에 대해 대충이라도 알아서인지 "아저씨 아들 태민이는 자폐가 있는데, 혹시 어떤 건지 아니?" 정도만 말해도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아이가 태민이와 비슷한 또래 혹은 더 어릴 경우가 어렵다. 태민이가 자기를 싫어한다거나 혹은 자기가 뭔가 잘못한 줄 알고 울먹이거나 삐지는 경우를 몇 번 겪은 이후로는 어린 친구들에게 꼭 '오빠/형아가 너랑 잘 안 놀아줄 수 있는데, 너의 잘못도 아니고 오빠/형아의 잘못도 아니다'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솔직히 말해서 설명한다 해도 아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
아이가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Looking after Louis" (한국에서는 "같이 놀자 루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를 아이와 함께 읽었다. 주인공인 '나'에게 새로 전학 온 남자아이인 루이는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고 "뭘 보고 있니?" 물어봐도 "보고"라고 대답하는 특이한 아이다. 다른 남자아이들이 축구하는 운동장 한가운데를 발레 하듯 뛰어다니거나, 선생님이 "똑바로 앉으렴"이라고 주의를 줄 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따라 해서 아이들을 웃게 만들어도 담임이나 보조선생님이 루이를 혼내지 않는 걸 보고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아침 쉬는 시간에 친구 샘이 새로 산 축구공을 자랑하다가 루이에게 "같이 축구할래 루이?"라고 물어보고, 루이는 "축구 루이"라고 대답하면서 샘을 쫓아 달려간다. 비록 루이에게 공을 차 줘도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지만 샘은 '잘한다 루이'라고 계속 외치며 격려하고, '나'는 루이가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그날 오후 루이는 계속 '잘한다'를 외치며 알지 못할 그림을 그렸고, 샘은 그림을 보자마자 '오늘 축구한 거 그린 거네!'라고 소리친다.
샘과 루이는 선생님의 특별 허락을 받아 축구를 하러 운동장으로 뛰어나간다. '나'는 화가 나서 "쉬는 시간 아니면 나가서 놀면 안 된다면서요?"라고 담임 선생님에게 따진다. 선생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그러게... 왜 그런 것 같니?"
선생님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문 밖의 샘과 루이가 뛰어노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특별해진 느낌이 든다.
고작 몇 장 되지 않는 동화가 이렇게 묵직하게 다가올 줄이야. 마지막 장을 읽을 때는 목이 메어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장애가 있는 학생을 친구로서, 학급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잘 그려낸 최고의 책이었다. 이 책이 한국과 미국에서 널리 읽힌다면 태민이의 상황을 굳이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런 날이 어서 오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