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 그랜딘의 "Loving Push"를 읽고
자폐인의 부모이거나 자폐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i.e. 교사, 치료사) 템플 그랜딘 (Temple Grandin)의 이름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그녀는 자폐로 인해 네 살 때까지 말을 할 수 없었고 일반 아이들과 다른 행동을 보였기에 의사는 '평생 보호시설에서 살아야 한다'는 진단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의 헌신과 자신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대학을 졸업하고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본인의 공감 및 관찰 능력을 살려 목장에서 가축 (특히 소)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하는 각종 장비와 시스템을 설계하는데 기여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2010년 "Temple Grandin"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필자와 같은 자폐인 부모에게 그녀는 존경의 대상이자 아이가 따라 걸었으면 하는 좋은 롤모델이기도 하다.
본인의 성장기와 내면을 그렸던 자서전 격인 '어느 자폐인 이야기 (Emergence: Labeled Autistic)'과는 달리 이 책 'Loving Push'는 '부모 및 치료사'를 위한 조언이 가득 담겨있다. 그랜딘 박사는 책 전반에 걸쳐 'Loving Push (사랑이 담긴 독려)를 통해 자폐 아동이 자신의 삶을 보다 낫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책에서는 현대 사회를 사는 자폐 아동들이 마주치는 문제들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1. 과보호로 인해 생활에 필요한 기술 (i.e. 상점에서 물건 사기, 운전하기, 대중교통 이용 등)조차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
2. 사회생활을 위한 기본 태도 (i.e. 정시 출근, 매너, 청결 유지, 지시사항 수행 등)를 갖추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이는 부모들이 엄하게 피드백을 주지 않음에 주로 기인함
3. 학교에서 옛날보다 직업 교육을 적게 제공 (i.e. 요리, 차 수리, 배관 등)
4. 지나친 스크린 노출 (컴퓨터 게임, 동영상 등)
그렇다면 부모와 교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가급적 빨리, 지속적이고 자주 loving push를 제공하여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배울 수 있게' 해야 한다. 가급적 스스로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하며 (물론 아이의 능력에 맞추어서), 아이가 삶에서 실수하고 그를 통해 배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아이가 안정적일 때 (= 배고픔, sensory 등이 없을 때) 꾸준히 아이에게 요구하고 격려해서 '아이가 불편해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게'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랜딘 박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많은 시사점을 주는데, 발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어린 시절에도 그녀는 손님이 올 경우 호스트의 역할 (악수하고 적절한 인사말 하기, 음식 서빙하기)을 하도록 교육받았으며, 역할을 다 하고 식사를 끝마친 후에야 테이블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혹시 나는 아이가 배우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걸 그냥 놔두고 있는 게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아이에게 충분한 기회와 반복적인 교육을 제공했을 때 이전에는 절대 못할 거라고 짐작했던 많은 일들을 씩씩하게 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i.e. 자전거 타기, 캐치볼, 가위질 등등).
책에서는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구체적인 방법도 소개한다. 예를 들어 방을 치우는 것을 가르치고 싶을 경우, "방 치워!"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와 같은 단계적 접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또한 자폐인들은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기에, 말보다는 종이에 써서 붙여놓는 식이 더 효과가 좋다.
1. 치워야 할 리스트 (이불 개기, 옷 걸기, 바닥 쓸기 등)를 주고
2. 아이와 함께 리스트를 보며 해야 할 일을 이해시키고 시범을 보인 후에
3. 아이가 지시 사항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이의 작업을 관찰하며
4. 명확한 데드라인과 미 준수시 일어날 일에 대한 설명을 곁들인다 (i.e. "5시까지 리스트의 일이 다 안되어 있으면 네가 좋아하는 유튜브를 보더라도 일단 끄고 청소를 마무리해야 해")
아이는 계속 성장하며 언젠가는 성인이 되기에, 부모는 아이들이 독립적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본적 생활 기술과 더불어 직업을 얻기 위한 기술을 함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대부분의 자폐인들은 왜 일을 해야 하는지, 왜 독립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동기 부여를 하지 못하기에 그냥 두면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꼭 부모가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직접 필요한 기술을 가르칠 수도 있고 학교와 협업해서 아이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멘토를 찾아줄 수도 있다. 책에 나온 아이는 영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의 부모는 학교와 협업해서 아이가 영화에 대해 공부할 수 있게 돕는 한편 영화업계에서 인턴십을 할 수 있게 도왔고, 이를 통해 아이는 필요한 실무적 지식과 경험, 네트워크를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게임/스크린 중독의 폐해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자폐 아동 (특히 남자아이)들의 경우 게임과 동영상의 자극에 훨씬 취약하다. 그렇기에 아이를 달래기 위해 전자기기를 주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며, 아이들의 스크린 사용은 부모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만 이루어져야만 한다. 굳이 전자기기를 써야 한다면 가급적 부모가 스크린에 나온 내용을 아이에게 질문하고 상세히 설명해주는 등 interactive 하게 활용하는 것이 좋다. 이 부분은 필자에게도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는데, 팬데믹으로 인해 학교 수업이 모두 컴퓨터로 이루어지고 실외 활동도 줄어들어 TV나 Pad를 통해 동영상을 보는 것이 아이의 일과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매번 타이머를 재면서 screen time을 통제하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책에서 추천하는 일당 1~2시간을 훌쩍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미래를 준비해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아이들이 미래를 대비하게 할 수는 있죠" - Franklin Roosevelt
자폐 아동들이 미래를 대비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폐인의 뇌는 변화와 새로운 것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살면서 많은 부정적인 경험과 실패를 겪게 되고, 그 기억으로 인해 어려움을 만날 때 겁먹고 쉽게 포기하려 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Loving Push는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부모가 아이를 강하게 (물론 사랑을 담아서) 밀어 나갈 때, 비로소 아이들은 자신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