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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의꽃 Dec 12. 2024

18. 그녀들

부디 존중과 사랑받는 아내가 되기를

 선데이스쿨 교사이자 선교센터의 일을 봐주고 있는 마마 카렌이 일주일째 출근을 하지 않더니 교회도 나오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선교사님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바바 카렌이 못 가게 했을 것이다라고 한다. 


"왜요? 바바도 가끔이지만 교회에 오는 성도잖아요."

"자기 기분이 괜찮고 저희에게 큰 불만이 없을 때만 성도예요. 당분간은 마마도 아이들도 안 보낼 거예요"

이유인즉슨 기술자들과 똑같이 일당을 달라고 했는데 거절을 당했기 때문이란다. 

 

선교사님 사역 중 하나인 보건소 건축 현장에서 그는 기술이 없는 허드레일을 하는 노동자이다. 

당연히 기술자들에 비해 일당을 적게 받는다.  

만약 그의 일당을 기술자와 똑같이 준다면 기술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뿐더러 다른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일꾼들과 일당을 줘야 하는 업주들에게 항의를 받을 게 분명했다.

어찌 되었든 이곳 역시 표준 급여라는 것이 있었다. 

  

그의 요구가 거절당하자 그는 다음날 바로 일하러 나오지 않았고 아내의 출근도 막았고 일주일 내내 교회에 오는 것을 기대하는 세 딸들의 예배도 막았다. 

  

"좀 지나면 다시 올 거예요.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서요."


그동안 이런 갈등이 얼마나 반복되었는지 괜찮다는 선교사님의 목소리에 체념이 묻어 있었다.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는 그녀의 상황이 더 궁금해졌다.  

한국 같으면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겠지만 핸드폰이 없는 그녀의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30분을 걸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야 했다. 

 

그녀는 등이 휘어져라 엎드려 장작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당의 빨랫줄에는 다섯 식구의 빨래가 끝도 없이 널려 있었고, 마당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새벽부터 엉덩이 한번 붙이지 못하고 종종거렸을 그녀가 그려진다. 


마당 한편에 놓인 평상에서는 바바카렌이 세상 걱정 없는 한량처럼 누워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옆에서 아내가 일을 하든지 말든지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처럼, 분명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와 남편이 아닌 마치 노예시대의 종과 주인 같아 보이는 괴기스럽게까지 보이는 풍경에 나는 마음이 상했다. 

상한 마음은 표정에서 드러나고 말았으니


굳은 표정으로 바바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 바바 역시 표정을 구기면서 나를 노려봤다. 

그러더니 누가 들어도 짜증이 범벅이 된 목소리로 마마를 부르더니 뭐라고 한다. 

그제야 나를 본 마마는 반갑게 다가오다가 바바의 큰소리에 멈칫한다.  

바바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마마는 나에게 그만 돌아가라며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pole라고 한다. 

왕복 1시간이 걸어서 찾아간 마마에게 나는 괜찮냐? 말 한마디 못 건네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건 뭐지?   

아무리 바바 카렌이 선교사님에게 서운하다 치더라도 이건 무슨 경우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이해가 잘 되지 않은 것은 어린아이처럼 죽 끓듯 변덕을 부리는 남편의 짜증과 마치 하녀 부리듯 명령을 내리는 남편의 부당함을 찍소리 하지 않고 다 받아주고 있는 마마 카렌이었다.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거야?      

“바바 카렌이 좀 많은 지참금을 지불하고 그녀를 데리고 왔거든요”


이곳의 결혼문화는 마하리(Mahari)라는 지참금 문화이다. 

남자가 지참금을 지불하고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참금의 액수에 따라 여자의 존재가치가 매겨진다. 

돈 대신 소나 양 염소로 지참금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동안 예쁘게 잘 키운 딸을 나의 아내로 허락하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의미로 처가에 건네는 선물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사랑과 신뢰가 아닌 지참금으로 시작하는 결혼은 남편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고  아내에게는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한다.      

지참금을 지불하는 순간 여자는 아내이기전 남편의 소유물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      


설마!! 아무리 탄자니아 시골마을이라고 해도 지금이 21세기인데? 진짜? 


믿어지지 않았지만 맞았다.      

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마 카렌의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가장(家長)인 바바 카렌의 명령 앞에서는 길에 떨어진 휴짓조각처럼 아무 소용이 없다. 

남편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은 그녀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  

    

마마 카렌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어도 소유자는 바바 카렌이다. 

바바 카렌이 바람을 피우거나, 또다시 지참금을 지불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속만 태울뿐이다. 

행여 그렇게 남편이 떠난다고 해도 그녀는 엄마로서 묵묵히 아이들을 키워나가야 한다. 

남편이 지참금을 지불한 대가이기 때문에 아내인 그녀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녀뿐만 아니라 이곳의 여자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여자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집이 많다.

부부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것이 당연한데도 이곳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런 결혼 문화 때문에 아버지의 권리를 뺏기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행여 연애 중 연인이 혼전임신이 되어 책임을 지고 싶어도 남자가 지참금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자신의 아이가 연인과 함께 지참금을 지불한 남자와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로서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고 한다.  

여자 측 부모는 자신의 딸이 평생 아이와 함께 단둘이 사는 한이 있더라도 지참금을 지불하지 않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는 게 지배적인 생각이다. 

(그렇지 않은 부모들도 있겠지만.) 

그동안 큰 노동력이 되어준 딸의 빈자리를 지참금으로 채워야 하는 여자 측 가족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넉넉한 지참금을 지불하고 아내를 데리고 와서 비록 교회는 못 다니게 하지만 일이 될만한 것은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성실히 일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바바 카렌은 훌륭한 남편인 셈이다. 

내가 봤던 이해할 수 없었던 풍경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던 거다. 

나의 딸이었다면 당장이라도 끌고 나왔을 정도로 화가 났는데 그건 내가 이곳의 문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유치원 교사인 에리카가 약혼했다. 

에리카의 약혼남은 에리카와 결혼하기 위해 300만 실링(한화 약 150만 원)의 지참금을 에리카 부모에게 지불했다. 이곳에서는 집 두어 채를 지을 수 있는 아주 큰돈이다. 

앞으로 에리카도 마마 카렌처럼 그에게 귀속되어 살 것이다. 

유치원 교사인 그녀의 월급은 모두 남편에게 상납될 것이고 어쩌면 그녀의 신앙생활도 제약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비록 유리알에 도금반지이긴 했지만 약혼반지를 낀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삼손은 언젠가 만나게 될 아내를 위해 열심히 일한다. 

물론 가정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고 기반을 다지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며 미혼 청년들이 감당해야 할 삶의 자세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지참금 때문이라면 어쩐지 씁쓸하다.      


물론 이곳의 청년들도 연애를 한다. 

가슴 절절한 사랑을 나누며 ‘너 없이는 안 돼, 우리 영원히 함께해.’라는 약속도 나눈다. 

하지만 정작 남자에게 지참금이 없다면 추억, 약속, 마음은 모래 위에 세운 탑과도 같다. 

대부분 연애 따로 결혼 따로이다.     

 

‘하나님을 더 잘 믿고 더 순종하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하나님의 딸이 되고 싶다’는 신실한 기독교인인 네에마에게 만약 사랑하는 남자가 지참금이 없으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더니 그건 곤란하다고 한다. 

홀로 자신을 키워온 엄마를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한다. 

지참금의 결혼문화는 신실한 네에마조차도 깨트릴 수 없는 무소불위와 같은 장벽이었다. 


나 역시 이런 문화에서 살았다면 어쩔 수 없었을까?

마마 카렌이 아이들과 함께 예배에 왔다. 

바바의 마음이 좀 풀어졌나 보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며 마마 카렌에게 이만 실링을 쥐여주었다. 

더 쥐여주고 싶었는데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나눔의 절제이다.   

한국돈으로 만원. 

한국에서는 밥 한 끼 사 먹을 수 없는 돈이지만 이곳에서는 일주일을 살 수 있는 큰돈이다. 

꼭 당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라고 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이었고 위안이었고 격려였다.  


어쩌면 그녀는 죽을 때까지 남편의 지참금으로 아내가 된 삶을 살 것이다. 

다른 집의 남편과 달리 성실하게 일하고 바람피우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자신의 가치에 비해 많은 지참금을 지불하고 자신을 아내로 삼은 것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제발. 부디 그녀가 억만금의 지참금보다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하지만 그녀가 세 딸을 통해 받게 될 지참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 딸을 자신의 재산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 딸이 지참금과 상관없이 다정하고 성실한 남자를 만나 따뜻한 연애를 해서 가정을 이루고 평등하고 건강하게 사랑을 주고받는 부부가 되기를 바라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네에마와 마마카렌.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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