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모든 아이는 세상 모든 어른의 선물이다
한 달 전 어린 동생을 업고 처음으로 선데이스쿨에 온 자와디(Zawadi)가 한 달 4주를 빠짐없이 출석을 해서 개근상을 받았다.
비록 한 달 개근이지만 학교가 아닌 선데이스쿨을 개근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선데이스쿨뿐 아니라 학교도 마찬가지.
한국에서는 개근거지라는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열심히 학교를 다녀서 개근상을 받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지났다고 하던데 이곳의 아이들에게 개근은 집안일도 밭일도 산일도 하지 않고 오직 학교에서 공부만 할 수 있는 그야말로 꿈의 세계에서나 받을 수 있는 상인 것이다.
학교에 가지 않은 일요일은 밀린 집안일을 해야 하고 그렇다고 학교에 가는 평일이라고 해서 노동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일요일이 되면 대부분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논과 밭으로 일을 나가거나 밀린 집안일을 해야 하며 동생을 돌본다.
집안에서 자와디의 역할은 이제 어린 동생을 돌보는 것이다. 돌봄보다는 양육에 더 가깝다.
그런데도 자와디는 동생을 업고 매주 일요일 한 달을 빠짐없이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다 떨어진 슬리퍼를 끌고 먼지 흙밭 길을 걸어 선데이스쿨에 왔다.
그것도 제일 먼저.
예배 한 시간 전부터 교회 마당에서 어린 동생과 놀고 있는 8살 자와디의 표정에는 입에서 난 내가 나도록 노동을 하고 잠시 쉼을 누리는 어른의 피곤함이 묻어 있다.
하지만 자와디의 쉼은 잠시. 예배가 시작되면 칭얼대는 동생을 달래고 어르느라 제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가지 않는 언니 껌딱지인 동생 때문에 자와디의 예배는 육아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자와디는 한 번도 예배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동생을 업고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했고 포대기로 동생을 칭칭 감싸고 뛰면서 율동도 신나게 한다.
자와디가 뛸 때마다 등의 동생이 떨어질 것 같아 위태해 보이지만 자와디는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을 다해 뛰고 춤추며 예배를 드린다.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자와디(Zawadi)는 선물이라는 뜻이다.
분명 자와디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모두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선물처럼 살라는 모두의 소망이었을 것이다.
자와디의 부모는 자신들 인생의 선물처럼 자와디를 안았을 것이다. 사랑하며 잘 키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시골 마을. 가난을 유산으로 대대로 이어받은 그들의 삶은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가끔 젖먹이 양육의 책임을 8살 어린 딸에게 전과시켜버리는 무책임한 부모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바람 한번 불면 바스러질 것 같은 가축의 우리보다 못한 자와디의 집을 찾아갔을 때. 자와디의 어린 등에 동생을 업게 한 부모의 삶을 이해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집이라도 지키기 위해, 적어도 아이에게 하루 한 끼라도 먹이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해야 하였으리라.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으리라.
하긴 자와디뿐만 아니다.
아이를 업은 아이는 빨래를 하거나 장작을 패거나 물을 긷는 아이처럼 우리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가난을 대대로 물려받은 아프리카 가난한 마을 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노동력이다.
지금의 어른들도 노동력으로 자랐다.
아이들의 손바닥은 마치 평생을 노동 현장에서 일한 인부의 손 같다.
겨우 열 살이 넘은 남자아이들의 몸은 노동으로 야무지게 다져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더 일해야 한다.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라고 해서 학비는 없다고 하지만 교재비 식비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이곳은 시험을 쳐야 다음 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시험을 치기 위해서는 시험비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돈이 없어 시험을 칠 수 없으면 다음 학년으로 진학을 할 수가 없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가난한 시골 마을의 아이들은 교재비, 식비, 시험비가 없어 진학하지 못해 학교에 다니지 않은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겨우 돈을 마련하여 진학하다 보니 중학생들의 나이가 18, 19살이다.
그렇게 겨우 중학생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교과서가 없다 보니 빌려보고 베껴 써야 한다.
수업이 끝났는데도 교과서를 필사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휴일에도 학교에 가야 하고 집에서 일해야 하는 아이들은 이마저도 할 수 없어 낙오될 수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교육을 받지 못한 상태로 어른이 되고 배우지 못한 어른이 되어 숙명처럼 가난을 자식에게 물러
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우고, 구제한다.
세상은 이야기한다.
그런다고 가난과 무지의 굴레가 끊어지냐고.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고 하는데 이 세상의 기아를 막을 수 있겠냐고.
왜 세상에는 자와디가 같은 아이들이 수없이 많냐고.
세상은 그것이 ‘불공평’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불공평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아니다.라고.
전 세계 크리스천이 하루에 100원만 내면 전 세계의 모든 기아는 사라진다고 한다.
세상이 불공평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불공평해서가 아니라 나눠야 할 사람들이 나누지 않아서 세상은 불공평 해진 것이다.
언젠가 이영표 씨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배고픈 3명의 아이들에게 빵 하나씩 나눠주는 것이 공평이 아니라 한 아이에게 3개를 주고 나누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평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마음속에 담아 있다.
각자가 자신의 빵을 먹으면 나눌 이유도 사랑할 이유도 없다.
내 생애 가장 큰 자부심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자와디를 이곳에서 만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자와디. 이름처럼 존재자체가 세상의 선물인 아이.
자와디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이는 세상 모든 어른의 선물이다.
아이들이 세상의 선물처럼 살 수 있게 하려면, 내가 사랑해야 한다.
사랑 외에는, 나의 100원을 내가 가진 빵 한 조각을 나누는 그 사랑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까.
이 땅의 수많은 자와디들이 가난으로 쓰러져가는 집안을 마을을 나라를 자신이 받은 사랑으로 세울 것이라는 소망으로 자와디와 그리고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만나면 꼭 안아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