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이면 어때? 너희들만 즐겁다면
토요일. 오후 3시 즈음이면 숙소 마당으로 아이들이 한두 명씩 모인다.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 공연 연습을 하기 위해 오고 있는 공연팀이다.
오늘도 새로운 아이들 몇 명이 보인다. 감사하게도 오늘 해야 할 일이 없나 보다.
한 달 넘게 연습했던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쉽게도 부모와 함께 일을 하러 간 모양이다.
이렇듯 아이들 상황이 여의치 않아 공연팀인데 딱히 고정멤버가 없다.
토요일에 와서 연습만 한 번 해도 모두가 공연팀이다.
처음 나도 과연 공연이 가능할까 싶은데 가능하지 않은 이유가 또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공연을 할 수 있는 공연팀원들이 있는데.
취미생활은커녕 마음껏 노는 것도 고사하고 노동에 찌든 아이들과 토요일만이라도 뭔가를 함께 하면 어떨까 싶어 아이들을 모았다.
거창하게 모집 공고를 붙인 것도 동네방네 소문을 낸 것도 아니고 몇몇의 아이들에게 ‘마마랑 토요일마다 같이 놀까? 친구들도 같이 데리고 와’라고 속삭이듯 이야기한 것이 전부였는데 첫 주에는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왔다.
그중에 대부분이 히잡을 쓴 무슬림 아이들이었다.
이방인 마마와 함께 친구와 같이 놀 수만 있다면 종교의 벽쯤은 단숨에 무너트릴 수 있어요.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고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사실 나는 그 ‘뭔가’에 대해 특별히 ‘무엇을’ 생각했거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름 대문자‘J’ 나름 계획적인 인간이었는데)
사실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도 몰랐다.
학교에 가지 않은 토요일. 일요일이 가장 바쁜 아이들이니까.
아이들을 만나고 나서야 그제야 부랴부랴 뭐를 할까 고민을 했지만 그 고민은 단숨에 해결되었다.
우리에게는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여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공연을 하자!!'로 구체적인 뭔가를 정했지만 문제는 아이들이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거였다.
'예수님이 태어난 날이야' 설명하니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자니 어쩌다가 예수님을 전하는 자리가 되었다.
(물론 여전히 스와힐리어가 비천하여 나의 훌륭한 도우미 통역가 네에마의 도움으로)
하지만 아이들은 예수님도 크리스마스도 알겠는데 왜 그날에 공연을 해야 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놀러 왔어요. 그게 노는 거예요?' 라며 좀 전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일단 구체적으로 어떤 공연을 할지 설명했다.
일단 연극을 하자. 그리고 율동을 하고 합창을 하는 거야.
여전히 그런 게 뭐냐? 는 표정의 아이들에게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비장의 무기 세계각국의 성탄공연영상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면서 하고 싶다며 재미있게 다며 기대감을 보였다.
다음 주부터 연습을 하자하며 아이들을 보내고 난 뒤 나는 이날을 위해 그동안 틈틈이 써두었던 수많은 성극대본 중 하나를 택해서 스와힐리어로 번역을 시작하고 공연을 할 찬양의 리스트와 율동까지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성탄공연 연습을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예상했다. 어쩌면 크리스마스 공연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무슬림 마을에서 토요일마다 크리스마스 공연 연습을 하기에는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만만치 않을 것이고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복병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역시나 다음 주에는 아이들이 6명밖에 오지 않았다.
그래도 눈물이 나올 만큼 반가웠고 고마웠다.
이곳에 오기 위해 아이들이 치렀을 대가가 부디 가벼웠기를 바라면서 연습에 들어갔다.
먼저 공연을 할 노래들을 들려주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기쁘다 구주 오셨네] [I wish you merrychristmas]
크리스마스면 전 세계 누구나가 부르는 노래들.
하지만 아이들은 처음 들어보는 노래들.
음악 수업이라곤 받아보지 못했던 아이들은 박자와 멜로디 개념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악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런 아이들에게 박자를 가르치고 음정을 맞추게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몸 가는 데로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자신이 부르고 싶은 대로 노래를 불렀던 아이들이 생전처음 옆의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고 박자를 맞춰서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 생소했을 것이다.
연습 첫날부터 나는 큰 산을 만난 것 같았다.
성극은.... 꿈도 꾸지 말아야 되겠다 싶었다.
다음 주에는 10명이 넘는 새로운 아이들이 왔다.
그제야 내가 넘어야 할 큰 산은 박자. 음정. 가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들쭉날쭉 드나드는 아이들이 고정멤버가 될 수 없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괜히 뭔가를 한다고 했나? 후회가 몰려왔는데 그렇다고 이제야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없는 일.
그래서 이 엉망진창 오합지졸 과도 같은 팀원들로 공연을 하겠다고?
마음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힘들어야 하는가 싶었다.
잘하고 싶어서였다. 제대로 된 공연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잘’과 ‘제대로’의 기준이 무엇이며, 왜 내 기준에 맞춰 ‘잘’ 해야 하고 ‘제대로’ 해야 하는가,라는 마음이 들자 조금 자유로워졌다.
예수님의 생일. 예수님이 받고 싶은 선물은 잘과 제대로가 아님이 분명할 테니까.
그래서 지금은 이렇다.
음정. 박자 안 맞고 가사 좀 못 외우면 어때?
연습 좀 안 나오면 어때? (못 나오는 것이다)
그냥 우리끼리 모여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이렇게 노는 거지.
이렇게 우리는 지금 연습 중이다.
하지만 이 연습이 실전이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