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함께 걷는 길
함께라면 길이 보일 지도
울퉁불퉁 비포장도로를 한 시간째 걷고 있다.
이렇게 먼 길인 줄 알았다면 발을 떼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드는 이유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짐작조차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 무작정 앞서가는 이의 뒤통수를 보고 따라가는 길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자신의 집에 난생처음 외국인이 방문한다고 기대에 부풀어있는 어린 남매를 실망시킬 수는 없다.
‘아직 멀었어?’ 목젖까지 차올라오는 질문을 삼킨다.
그나마 그늘을 자주 만났기 때문에 조금은 견딜 수가 있다.
앞서 걷는 아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나를 기다려준다.
아이들의 얼굴에서는 설레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6개월 된 딸(loveness)을 업고 있는 18살 페니나(penina)와 그녀의 어린 동생. 아쥬와이(ajuwai)와 조이(george)다.
현지교회. 저곳이 교회의 전부이다. 전날이었던 주일.
스톤타운의 한인교회 대신 현지교회에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만난 아이들이다.
비록 얼기설기 세운 기둥에 구멍이 쑹쑹 뚫린 양철지붕을 씌운 것이 전부인 가난한 교회에 다닐지라도 주일예배만큼은 깨끗이 씻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예배를 드리기 마련인데 페니나 남매들은 행색이 너무 초라해서 눈에 띄었더랬다.
다 떨어진 옷은 족히 몇 달은 입은 것 같았고 언제 씻었을까 싶을 정도로 아이들의 온몸은 때구정물이 흐르고 있었다.
큰 언니에게 업혀 있는 막내인 듯한 젖먹이 아이 또한 다르지 않은 몰골이었다.
처음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냇동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린 엄마와 이모 삼촌이었다.
아기 아빠는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모른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 아빠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어린 엄마들을 하도 많이 봐와서 이젠 놀랍지도 않다.
6개월이 되었다는 아이는 첫눈에 봐도 영양결핍이 심각해 보였다.
18살 어린 엄마 페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매들은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교회라고 해서 남매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있는 형편은 안 되는 것 같았다.
30여 명의 성도들 역시 말끔히 차려입고 오기는 했지만 내가 선물로 가지고 온 사탕을 허겁지겁 까서 입에 넣는 것으로 보아 교회 살림도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하는 아이들만큼이나 가난한 것 같았다.
아이들의 집을 방문하고 싶어서 조심스럽게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되냐?' 고 물었더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카리부 하며 좋아한다.
그런데 집이 이렇게 멀 줄이야.
당연히 교회 근처인 줄 알았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주린 배로 맨발로 아이를 업고 이 먼 길을 걸어 교회에 왔다는 것이.
또한 하루도 되지 않아 그 길을 다시 걸어 나를 만나주러 왔다는 것이.
어쩌면 무례할지도 모를 부탁을 아이들은 기쁨으로 들어주었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어쩌면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것이다.
물론 필요하다면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진 재정으로 남매들의 필요를 조금은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것이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다행히 만 다지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아침을 먹지 못한 아이들에게 만다지를 사주고 나도 먹으면서 다시 걷는다.
찌든 기름에 튀기긴 했었도 먹으니 한결 힘이 난다.
등에 업힌 아이도 신경이 쓰였는데 더러운 기름에 튀긴 밀가루 빵인 만다지를 그냥 먹인다.
당연히 모유를 먹일 줄 알았는데 이미 오래전에 말라비틀어진 젖샘인듯했다.
오늘은 만다지라도 먹일 수 있어서 감사하단다.
오늘 왜 학교에 가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물어보지 않아도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가슴이 먹먹해서 괜히 아직 멀었어? (bado?) 물었더니 아직 멀었다(bado!)고 한다.
어쩌면 아이들이 평생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인생이 이 길과 같지 않을까? 싶었다.
30분을 더 걸어서 겨우 도착한 그녀의 집에서는 3명의 어린 동생들과 엄마가 기다리고 있다.
6명의 고만고만한 아이와 아빠가 없는 1명의 손녀를 둔 그녀는 7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만삭인 그녀에게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아이들 학교도 보내지 못하면서, 어쩌자고 또 임신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나의 안타까운 마음과는 달리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소개하는 그녀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여느 아프리카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 자랑이다.
남편이 있든 없든, 아버지가 같든 다르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며칠 전에는 홀로 아버지가 다른 9남매를 키우고 있는 엄마를 만났다.
9명의 아이 중 2명만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쌀과 기름과 사탕을 사주고 돌아오는 길, 홀로 어린 손주들을 키우는 노인들도 만났다.
가난한 과부와 아이들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언제나 마음이 무겁다.
당장 그들에게 필요한 먹을거리를 줄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일까?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찾고 싶은데 없다. 그저 막막할 뿐이다.
나는 그저.
막막하고 끝 모를 고통의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의 인생의 길에서 만난 한 점 그늘 같고, 잠시라도 허기를 면하고 쉬어갈 수 있는 만다지 가게 같은 존재가 되어 주고 싶었다.
나 역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기에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조금은 알 수 있다.
끝 모를 막막하고 암담한 길.
하지만 그 길에서 사랑을 만났다.
어떤 사랑은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었고, 어떤 사랑은 함께 걸어주었다.
그렇게 함께 걷는 누군가가 만들어주었던 그늘과 위안과 격려가 있었기에 지금 나와 나의 아이가 있었고,
나 역시 누군가의 그늘이, 동행자가 되고 싶은 삶을 꿈꾸면서 살고 있다.
페니나 가족에서 쌀과 기름을 사라고 얼마간의 돈을 준 뒤 이튿날 다시 아이들과 만나기로 했다.
어쩌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바로 '글'이었다.
어쩌면 지금 아이들에게 당장의 밥과 옷보다 더 필요한 것일 것 같았다.
아이들이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글을 가르쳐줘야 될 것 같았다.
문맹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여정이 희망으로 내딛는 길의 시작이기를 바라면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한다.
이튿날.
책상도 의자도 없는 교회 공간에서 생애 처음으로 노트를 선물 받고 볼펜을 손에 쥐어본 페니나 4남매는 a b ch d e를 배우기 시작했다.
일단은 아이들과 함께 발을 떼어보기로.
그렇게 함께 걷는 길의 시작을 해보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