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새롭지. 사랑만 있다면.
한 달에 두 번. 2시간 정도 차를 타고 달려 모시에 간다.
모시는 탄자니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탄자니아내에서도 기후와 환경이 좋은 동네이다.
유명한 킬리만자로 산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세렝게티와 그에 버금가는 국립공원 응고로고로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챔챔이라는 꽤 알려진 온천도 모시에 있다.
큰 재래시장도 있고 슈퍼마켓. 백화점. 가전제품 대리점도 있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식자재가 아닌 제조품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다.
우리 동네에서 겨우 2시간 거리인데 모시는 마치 딴 세상 같다.
가끔 모시에 나와 계란과 우유 식용유와 빵 과일이나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하고
가끔은 커피와 스파게티가 너무 맛있는 유니온에서 외식을 하곤 한다.
(먹을 때마다 아이들이 걸리곤 하지만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기에 되도록이면 아이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모시에서 관광지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있는데 바로 미툼바 시장이다.
미툼바는 스와힐리어로 중고라는 뜻인데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버려진 옷과 신발들을 깨끗하게 세탁해서 팔고 있다.
모시의 미툼바는 탄자니아에서 가장 큰 중고시장이라 10시간도 쇼핑이 가능한 곳이다.
한국에서 신고 온 나의 고급 운동화를 본 선교사님이 이곳에서는 땅바닥이 너무 뜨겁고 비포장 도로이기 때문에 운동화가 감당이 되지 않는다며 막 신을 수 있는 신발이 필요할 것 같다며 미툼바에 가자고 했다.
아프리카에 살기로 작정했을 때부터 물건에 대한 욕심과 편견은 버렸다.
사실 그전부터 물욕이 없었기에 버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속옷과 신발만큼은 남이 주는 것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욕심과 편견을 버린 것이 아닌가?)
그런데 새 신발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어마무시한 고가인 데다 어차피 우리 동네에서는 좋은 신발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할 수 없이 중고 신발을 신기로 결정하고 미툼바로 향했다.
처음 가본 미툼바 시장은 그야말로 어마무시하게 방대했고 어마무시하게 사람들이 많았다.
(하필이면 내가 처음 간 날이 장날이었다니.)
더위와 냄새와 무질서와 소음과 호객행위들로 나는 그야말로 멘붕 상태였다.
한국의 이마트 쇼핑도 어려운 나에게는 혼돈 그 자체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멘붕 상태가 심해졌고 속까지 울렁거려서 나는 신발이고 나발이고 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가뜩이나 힘든데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 사람들 때문에 신경도 예민해져 갔다.
그래도 어디서 왔냐고 묻는 이들은 열에 한 명이고 남은 아홉은 '니하오'이다.
그냥 그러려니 지나가도 될 것을 예민해진 신경은 그게 안된다.
'니하오' 하는 그들에게 일일이 '안녕하세요' 라며 한국말로 인사를 해준다.
그때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안 상인이 나에게 다가와 국가기밀을 알려주듯 은밀하게 이야기한다.
"나에게 한국돈이 있어요!!"(Nina pesa za kikorea)
순간,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한국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는 탄자니아 중고시장에서 웬 한국돈? 어째서?
가서 보니 가방에서 나온 한국동전이며 지폐들이 어마무시하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 거래되는 가방의 60%가 한국에서 버려진 것들이라고 하는데 버려진 것은 가방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오히려 돈을 주고 버려야 할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색깔도 이쁘고 튼튼한 데다 한글까지 박혀있어서 엄청 인기가 있다고 한다.
가방에 딸려온 적지 않은 한국돈은 환전이 되지 않아 기념으로 갖고 있는 상인들이 꽤 있다고 한다.
상인은 싸게라도 좋으니 환전을 원했고 동전이 많아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동전을 만드는 재료인 구리 니켈이 한국의 귀한 자원이라는 생각에 반값에 환전해 주었다. (만원당 만 실링. 한국돈으로 오천 원)
환전을 해보니 20만 실링이나 되었다.
두 달 동안 가방을 겨우 팔아야 생기는 돈을 한국사람을 만나는 바람에 얻게 되었다며 좋아한다.
나 역시 십만 원으로 이십만 원을 얻었으니 이게 러키인 것인가?라는 마음에 좀 전의 힘듦은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가방 가게 바로 옆에서 그렇게 눈에 띄지도 않았던 마음에 드는 아주 싼 중고 신발도 구했다.
이제 집으로 가는구나 싶었는데 선교사님의 볼일이 남아있었다.
하긴 미툼바까지 오는 것이 쉽지 않은 여정이다 보니 왔을 때 필요한 것들을 구입해야 한다.
이해는 했지만 시장을 보는 선교사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또다시 힘듦과 피곤함이 몰려오면서 나는 세상에서 쇼핑이 가장 힘든 사람인 것을 선교사님께 알려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발에 맞는 신발도 언제 쓰일지 모를 한국돈 십만 원이 준 위로의 약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제라도 선교사님께 이야기를 하자. 그리고 두 번 다시 미툼바에 오지 말자. 쇼핑이 어려운 나를 존중해 주자.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라는 마음이 들 때즈음 양말 가게가 보였다.
그제야 나는 양말이 없어서 트램벌린을 타지 못한 아이들이 생각났다.
주일 예배 후, 아이들에게 트램벌린을 탈 수 있도록 해준다.
선교사님이 아이들을 위해 무려 버스를 10시간 타고 다르살렘에서 구해온 대형 트램벌린이다.
당연히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학년별로 20분씩 놀게 하는데 문제는 아이들 발이다.
씻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은 아이들의 발은 나무껍질만큼이나 거칠어서 트램벌린 바닥이 금세 닳고 찢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트램벌린을 타고 싶으면 양말을 꼭 신고 오라고 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양말이 없었다. 그나마 양말을 신고 온 몇몇의 아이들 양말을 돌아가면서 신고 트램펄린을 이용할 수 있었다.
양말 한 켤레로 열 명의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신으니 양말은 거의 걸레가 되었고 양말 역시 트램벌린 바닥처럼 무사하지 못했다.
양말을 신는 의미가 없었다.
양말을 사주고 싶어도 우리 동네에는 양말을 팔지 않아서 안타까운 마음이었는데.
이곳에서 양말을 팔고 있었다!!
방대한 중고 시장에 양말정도는 파는 게 당연한 것 같았지만 3시간이 넘어 처음 발견한 양말가게였던 것이다.
50켤레 대량 구매했다.
양말을 신고 신나게 트램벌린 위에서 뛰고 좋아할 아이들 생각에 거짓말처럼 피곤함과 힘듦이 싹 사라졌다.
새양말을 사주고 싶었지만. 이곳은 미툼바. 중고시장이었으니 새것 같은 양말을 구한 것만으로 충분히 기쁘고 행복했다.
언제 떨어져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나의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고 아이들을 만나러 갈 때 나의 마음은 설레고 행복할 것이다.
그처럼 언제 떨어져도 하나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발에 꼭 맞는 양말을 신고 트램벌린에서 뛰어놀 때 아이들도 설레고 행복했음 좋겠다.
미툼바에 오길 잘했다.
비록 피곤하고 힘들고 멘붕이 왔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