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따뜻함이 누군가의 빛이 될 수도 있지.
며칠째 말라리아를 앓고 있는 글로리가 내가 가져간 사과 두 알을 앞에 두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 글로리 인생에 첫 사과인 것이다.
그런 글로리를 보고 있으니 난생처음 두리안을 먹었을 때가 기억난다.
십 년도 훨씬 전.
탈북자 구출을 위해 중국에 머문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 내 인생에 그런 적도 있었지 이제는 아련한 시절이 되었지만, 가끔씩 동남아를 갈 때나 한국에서도 귀하디 귀한 두리안을 볼 때면 그때의 어느 한순간의 기억이 선명해지곤 한다.
장백에서 떠돌고 있는 10살 탈북소년을 공안을 피해 안전가옥으로 데리고 오고 난 뒤 그만 몸살이 걸리고 말았다.
열흘동안의 목숨 건 여정 가운데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다가 갑자기 긴장이 풀렸으니 몸이 탈이 날 만도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가벼운 몸살이려니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회복은커녕 몸상태가 더 심각해져 가는 것이었다.
열은 떨어지지 않고, 몸은 물 한 방울도 용납해주지 않았다.
물만 마셔도 겨워내는 통에 탈북자 구하려 중국에 왔다가 내가 죽겠구나 싶었다.
몸이 아프면 마음의 아픔은 따라온다.
건강한 육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나온다 라는 말은 만고진리이다
그만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 순간. 함께 지내던 탈북자 소녀가 어디서 구했는지 두리안을 구해서 온 것이다.
"고모(당시 나는 탈북자들에게 고모로 통했다) 이게 세상에서 제일 귀한 과일이라고 합니다.
몸에 좋아서 이걸 먹고 기운을 차린 사람 이야기를 두루두루 들어봤소. 이거라도 어여 드시오"
그러고 보니 온 집안이 두리안 똥내로 가득했는데,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 없이 내가 뭐라도 먹고 기운을 차리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눈빛이었다.
사람들은 두리안의 지독한 냄새 때문에 먹지 못한다고 하던데, 이미 통증 외 온몸의 감각이 무뎌진 상태였던 나는 뭐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난생처음 보는, 이름도 생소한 두리안을 베어 물었는데.
아직도 그 첫맛을 잊지 못한다.
입안 가득 퍼지는 그 강렬하고 찐득한 들쩍지근함이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것 같았다.
이후 나는 앉은자리에서 누구한테 먹어보라는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한 접시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 이튿날 언제 아팠냐는 듯 기운을 차리고 사선을 넘어 한국으로 향하는 탈북자들을 배웅해 줄 수 있었다.
나중에서야 그 한 접시의 두리안을 구하기 위해 한국행을 앞둔 탈북민들의 쌈짓돈을 털어 목숨을 걸고 두리안을 구하러 다녔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에게 목숨과도 같은 두리안 한 접시를 건넨 탈북민들은 목숨을 건 여정의 길에 오르면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는 알고 있는지 그저 내가 두리안을 먹고 기운을 차려준 것에 연신 고맙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한국에서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며 눈물의 약속을 했다.
라오스의 난민 수용소를 거쳐 국정원과 하나원을 지나 그들이 한국에서 나를 만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 뒤 소식만 들었지 여러 상황과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녀들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두리안을 보면,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녀들을 생각한다.
그녀들이 나눠준 사랑, 절망 속에서도 타인을 위해 나눔을 선택한 그녀들의 배려와 사랑은 좀 더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나의 꿈에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것 같다.
스펙터클하고 엄청난 사건사고가 터닝포인트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소소하고 사소한 일상의 따뜻함이 누군가의 인생을 반짝이게 하는 한 점이 되는 것 같다.
이곳에서는 사과가 한국에서는 귀하고 비싼 두리안과 같다.
한 번도 사과를 먹어보지 못한 글로리가 어떻게 먹냐고 물어본다.
나는 사과를 깎아 글로리에게 내놓았다.
그 예전 두리안을 다듬어 나에게 내놓았던 그녀들의 마음이 이랬구나 싶었다.
(물론 사과가 두리안보다 백만 배 손질하기 쉽다)
깎아놓은 사과를 한 입 베어문 글로리의 눈빛이 반짝인다.
분명 너무너무 맛있다는 거다.
하지만 글로리는 두쪽을 먹고 두쪽을 남긴다. 엄마를 주겠단다.
주위 사람 생각하지 않고 나 혼자 그 귀한 두리안을 먹어치운 것이 생각나 새삼 부끄러웠다.
엄마 것은 있으니 너 다 먹어했더니 글로리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사각 베어문다.
사각 소리와 함께 글로리의 눈도 입도 사각 같은 소리를 내듯 웃는다.
이튿날 글로리 집에 가보니 언제 아팠냐는 듯 글로리는 물을 긷고 있었다.
난생처음 사과를 먹은 글로리는 사과 한입의 추억을 소환할까?
가끔씩 사과를 볼 때 무엇을 기억할까?
글로리 인생이 한알 천 실링(한국돈 500원) 하는 사과를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행여 그렇지 않더라도 글로리 인생에 말라리아와 같은 복병을 만나고 힘든 여정가운데 있어도 오늘 우리가 나눈 소소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글로리의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