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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한 골방 Jan 31. 2024

공허한 삶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도널드 위니캇의 참 자기와 거짓 자기

  사회적 가면, 혹은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진정한 나의 모습과 사회에서 내게 요구하는 모습이 충돌할 때, 우리는 사회적 가면을 사용합니다. 설령 사회적 가면이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 없으셨던 분들도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가면은 쓰고 계실 거예요. 우리는 각자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사회적 가면을 착용하곤 합니다.


  인터넷에서 상당히 내향적인 사람이 회식자리에서 기가 빨린 채로 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만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워낙 유쾌하게 그려주셔서 읽는 중간에는 웃으면서 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회식이 끝나고 집에서 공허함을 느끼는 주인공을 보고 나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더라구요. 진정한 나의 모습은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한 사람인데, 회식자리에 가서는 괜히 말도 한번 더하고 웃음도 한번 더 지어봤겠지요. 그러면서 이 사람은 회식자리가 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겠죠. 하지만 이렇게 노력함으로써 회사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을 거에요.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척하는 사회적 가면을 쓰느라 많이 답답했겠지만, 이 사람은 사회적 가면을 통해서 직장 내 대인관계를 보다 탄탄하게 만들어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가면에 늘 순기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가면은 사회와 맞지 않는 우리의 민낯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주는 사회생활의 필수 요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 가면을 계속 쓰면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어떨까요. 숨을 쉴 때 답답하기도 할 것이고, 진짜 내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도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겠죠. 이처럼 가면을 평생 쓰고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고통을 동반할 수 있기에, 가면을 벗을 수 있을 때는 벗어야해요. 사회적 가면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회적 가면도 필요할 때는 써야겠지만, 반대로 필요하지 않을 때는 벗고 지낼 수도 있어야 우리 마음의 숨통이 트이고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도 생깁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삶이 답답하고 공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정신분석가인 카를 융(Carl Jung)은 사회적 가면을 두고 페르소나(persona)라고 표현했는데, 페르소나는 현재까지도 융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앞으로는 사회적 가면 대신 페르소나라는 표현으로 소개드리려고 해요.

  

이들이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가면을 썼듯이, 우리도 사회에서 주어지는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페르소나를 사용합니다. (출처 : pixabay)




  회식 때만 그런것이 아니라, 삶의 전부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그들의 마음할 수 있는 대상관계이론이 있어서 이번 글에서 소개드리려 합니다. 대상관계이론가인 도널드 위니캇(Donald Winnicott)거짓 자기(false self)라는 개념입니다. 소아과 의사이자 대상관계이론가였던 그는, 소아과에 찾아오는 평범한 부모-아이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위니캇의 이론은 병리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대체로 건강한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리고 있어요. 실제로 그는 20년간 영국의 BBC 방송에서 평범한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육아강연을 진행했었고, 한국에도 이 강연내용들을 담아 '충분히 좋은 엄마'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기도 했었죠. 이렇듯 위니캇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심리적으로 성장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위니캇이 가장 강조하는 양육의 목표는 참 자기(true self)였습니다. 거짓 자기와 반대되는 개념인 참 자기는 진정한 모습의 자기 자신이에요. 그는 참 자기가 존재해야 각자의 개성이 살아있는, 활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에 공감이 잘 되시나요?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참 자기 없이 살아가는 것은 어떤 삶일지 A씨의 삶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A라는 30대 남성이 있습니다. A씨는 엄격한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고, 부모님은 그의 의견을 존중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A는 자기주장 없이 부모님의 의견을 따르면서 살아왔습니다. 하다못해 그는 사춘기 때조차도 부모에게 사소한 반항조차 해본 적 없었습니다. 그랬던 A는 어느덧 서른이 되었고 취업을 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성실한 직원이자 남편인 그는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는 삶을 삽니다. 늘 주변 사람들에게 맞춰주니 남들과 갈등이 생길 일도 특별히 없었죠. 하지만 어느덧 A는 삶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맞춰오는 삶만 살아왔기에, 자신의 인생에서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A는 앞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으며 공허한 삶에서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A의 탈출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서는 진짜 자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고민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공간은 가족과 함께하는 집이죠. 하지만 A씨는 가족들과 함께 있는 순간에도 진정한 나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고민해보지 못하고, 가족들의 요구에만 순응하며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페르소나를 쓰는 삶에만 익숙해진 그는 사회적 가면을 벗는 법조차 잊어버린 채로 살아갑니다. 결국 A의 삶은 가면에 가려져 점차 활력을 잃어가요. 주변에서 원하는 모습에 맞춰주기에도 바쁜 삶이었고, 그가 진심으로 원했던 삶은 형체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집니다. 이와 같이 참 자기가 사라져 버린 삶이 거짓 자기의 삶입니다. 빈 껍데기와 같은 거짓 자기의 삶은 문제가 될 정도로 공허하게 느껴질 수 있고, 이 공허함은 자체로도 위험하지만 우울,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더욱 위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참 자기의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고 싶으시다면, 참 자기가 형성되는 과정을 알아야만 하겠죠. 위니캇은 참 자기가 어떻게 싹을 틔운다고 보았을까요? 우리는 태어났을 때부터 기본적인 욕구들을 경험합니다. 갓난아기도 먹고, 자고, 싸고 싶은 욕구들이 있듯이요.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욕구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시의적절한 부모의 도움으로만 해소가 가능합니다. 이때 부모의 도움은 아이가 신체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동시에 아이가 원하는 세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신적 교감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배고프다고 보채면서 식욕을 표현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볼게요.


1. 배고프다며 울고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의 욕구가 표현됨)
2. 이때 부모는 아이를 안아주면서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요. (부모가 아이의 욕구를 파악함)
3. 아이가 배고프다는 것을 눈치챈 부모님은, 아이가 원하는 대로 배고픔을 해결해 줍니다.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킴)


  위의 예시에서 들었던 과정들은 아이의 배고픔을 알아채고 공감해 주는 행동들입니다. 이 부모들은 이렇듯 시의적절하게 아이의 요구에 반응할 수 있었고 아이에게 공감적인 환경을 제공했지요. 그리고 이 아이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면서 참된 자신의 모습, 즉 참 자기를 점차 알아갈 수 있었을 거에요. 이렇게 아이의 요구를 잘 수용해 주는 대상이 되어주는 어머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위니캇은 이 어머니의 역할을 대상으로서의 어머니(object mother)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따뜻한 안아주기 환경이 제공되지 않으면 아이는 큰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생존을 위해 부모에게 순응하려고 노력해요. (출처 : pixabay)


  만약 아이의 욕구에 대해 잘 반응하지 못하는 부모가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어떨까요? 어린아이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이 아이는 큰 좌절을 겪으면서도 생존을 위해 자신이 부모의 욕구에 충실히 반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아이는 부모가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해서만 초점을 둬요. 결국 아이는 막상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는 둔감해진 채로 주변의 요구에만 피상적으로 순응하게 됩니다. 참 자기는 잊은 채로 페르소나만 사용하면서 살아가는 거죠.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처럼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참 자기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잊은 채로 거짓 자기의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맞춰주기만 하면, 무조건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위니캇은 아이를 과하게 보호하는 것도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 것과 같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찾지 않을 때는, 아이와 함께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부모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마치 아이의 주변 환경에 존재하는 사물처럼 아이가 하고 있는 것을 그저 바라만 봐주는 것과 비슷하죠. 이렇게 아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로 관조할 수 있는 어머니의 역할을 두고 환경으로서의 어머니(environmental mother)라고 합니다.


   과보호받으면서 자란 아이는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요? 자신의 요구에 따라주는 부모만 겪어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서 페르소나를 적절히 사용할 줄 모릅니다. 또한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서만 자라왔기에 의존을 포기하지 못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런 아이들도 나중에는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습에 따라가야 할 순간이 분명히 오겠죠. 그때가 되면 환경으로서의 어머니를 겪지 못했던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기적이고 의존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으로서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환경으로서의 어머니의 역할도 아이의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서 상당히 중요해요. 위니캇은 대상으로서의 어머니와 환경으로서의 어머니를 합쳐서 안아주기 환경(holding environment)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결국 위니캇이 설명하는 최고의 엄마는 안아주기 환경의 역할을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엄마입니다.




  거짓 자기의 삶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참 자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위니캇은 사람에게 강력한 자기 치유의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 참 자기를 오랫동안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참 자기를 되찾아가는 과정은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는 것에 불과합니다. 참 자기를 되찾는 과정 자체는 쉽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을 수 있더라도, 자신이 정말 살아가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떠올리다 보면 다른 사람에 밀려서 잊혔던 욕구와 소망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낸 욕구와 소망들이 씨앗이 될 것이고, 안아주기 환경을 제공할 사람이 따스한 햇살이 되어서 참 자기를 다시 아름답게 피워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참 자기를 되찾아서 꽃피우기 위해서는 나의 소망과 나를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제까지 글을 써보고 싶었던 저는 그간 일상에 치이느라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글을 쓰고, 제 글을 안아줄 독자분들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작가로서의 기회를 얻은 저의 삶은 지금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감사하게도 참 자기를 피워낼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혹여나 거짓 자기 속에서 답답하셨다면, 언젠가 참 자기를 꽃피우실 수 있기를 응원하겠습니다.




거짓자기의 삶은 공허합니다.
참 자기도 숨쉴 순간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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