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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스한 골방 Jan 30. 2024

가스라이팅을 정신분석적으로 설명하면?

멜라니 클라인의 투사적 동일시

  요즘은 비교적 잠잠했지긴 했지만 최근까지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기는 한데, 그  이유는 가스라이팅에서 오는 유혹 때문입니다. 대인관계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이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 될 수 있어요. 이전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일상의 대인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은 한쪽의 큰 잘못에서 온다기보다는, 양쪽의 가치관이 맞지 않아서 생기는 불협화음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가스라이팅이라고 표현해 버리는 순간, 한쪽은 절대적인 가해자가 되고 나머지 한쪽은 절대적인 피해자로 변화할 수 있어요. 물론 범죄에서 나오는 가해자-피해자와 같이 한쪽의 잘못만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번 갈등상황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표현을 남발한다면 어떨까요. 현재의 갈등상황을 자신의 잘못은 하나 없는, 상대방의 잘못만이 가득한 상황으로 몰아가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보다 나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위험도 충분히 있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가스라이팅이라는 표현을 남발하는 사람은 우울자리보다는 편집분열자리에 위치하면서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그래서 가스라이팅이라는 표현은 사용하기 전에, 한번 더 고민해보고 사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번에는 가스라이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진통제도 남용될 있지만 정확한 사용법을 알고 사용하면 도움이 되듯, 가스라이팅도 표현이 남발되지 않고 정확한 뜻을 알고 주의할 수 있다면 오히려 우리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국립국어원에서는 가스라이팅의 순화어로 '심리적 지배'라는 단어를 제안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가스라이팅 대신 심리적 지배라는 표현을 사용하록 할하겠습니다. 심리적 지배는 어떤 뜻일까요? 사전에서 참고한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심리적 지배 : 설득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스스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

   

  심리적 지배의 뜻에서 심리적 지배가 무서울 수 있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의심을 하도록 해서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지배당한다는 점이에요. 사실은 상대방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도 있는데도, 심리적 지배를 당하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의지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리적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어있는 경우가 적지 않죠. 심리적 지배는 어떤 과정을 거치기에 겪는 당사자들도 모르게 물밑에서 진행될 수 있는 걸까요?


심리적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은 마치 꼭두각시처럼 자율성을 잃어버렸을 때도, 본인은 스스로의 의지로 상대방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위험합니다. (출처 : Pixabay)




  정신분석에서도 심리적 지배와 비슷한 개념이 존재합니다. 멜라니 클라인의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라는 개념이에요. 투사적 동일시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해로운 마음을 투사당한 상대방을 조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 투사가 내면의 나쁜 마음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마치 남탓과 같은 방어기제라고 설명드렸죠. 투사에 상대방을 조종하는 과정이 추가된 것이 바로 투사적 동일시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투사적 동일시는 남탓을 통해서 타인을 조종하는 것이 되겠죠. 사실 이 개념은 처음 들었을 때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남탓을 했는데 어떻게 사람이 조종당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속는 셈 치고 우리 일상에서 한번쯤은 있을 법한 A씨와 B씨의 이야기를 보실게요.


  A씨는 비록 의식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A에게는 오래된 친구 B씨가 있습니다. B는 평소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B는 자신이 좀 힘들더라도 때론 과도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A의 요구들을 거절한 적이 없었고, 그런 B씨 덕분에 A는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A와 B의 관계는 겉보기에는 평온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이 아파서 정신이 없었던 B는, 이전에 잡아둔 A와의 약속을 깜빡 잊어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이를 알게 된 B는 A에게 다음과 같이 사과합니다.

  "이번에 내가 가족 일로 정신이 없어서 너랑 함께 만나기로 한 약속을 깜빡했어. 정말 미안해."

  A는 B의 사과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B가 평소에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A는 결국 분노하게 되고, B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랑 한 약속을 잊는 게 말이 돼? 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는데, 그동안 너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나 보네. 이제 우리 앞으로 얼굴보지 말자. 너는 정말 친구로서 최악이야."  

  그렇잖아도 B는 가족일로 힘들어하던 와중에 A의 절교 선언으로 인해 큰 상처를 받습니다. 이제 B도 자신의 힘든 마음을 A가 전혀 존중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분노하기 시작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정말 한심하다. 평소에 요구만 해댔던 네가 정말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야말로 정말 친구로서 최악이야"

  이 말을 듣은 A는, B가 평소에도 자신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이 역시나 사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A는 과거에 B가 자신의 요구를 존중하면서 수용해 줬던 고마운 기억들은 모두 잊은채로, 깔끔하게 B와의 관계를 정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아무래도 투사적 동일시가 복잡한 방어기제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그럼 남탓이 어떻게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는지, A와 B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림으로 정리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1) A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중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 즉 부적절감이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B가 워낙에 A에게 잘 맞춰줬기 때문에 A와 B의 사이에는 큰 문제가 없었죠. 그래서 A의 무의식 속에 있던 부적절감은 밖으로 드러날 일도 없었고, 겉보기에는 A와 B는 친한 친구처럼 보여왔습니다.


(2) 그러다 B가 A에게 실수하는 일로 인해서, A는 상처를 입고 마음이 불안정해집니다. 그러다가 A가 평소에는 무의식에 잘 숨겨왔었던 부적절감고립감이 의식으로 불쑥 튀어나오게 되었어요. 이제 A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시작된 분노의 감정까지도 느낍니다. 하지 A는 들끓고 있는 자신의 부정적인 마음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어서,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3) 자신의 마음을 감당하지 못했던 A는, 결국 내면에 있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B에게 투사해버립니다. 투사를 통해서 부정적인 마음을 건네받은 B도 부적절과 고립감에서 오는 분노를 A처럼 느끼게 되었죠. 함께 같은 이유로 화가난 B는 더 이상 A를 존중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A가 예상했던 대로, 아니 A가 바랬던 대로 결과가 나왔기에 A는 B와의 관계를 찝찝함 없이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A와 B의 이야기에서 A는 의식적으로 B를 조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A는 느끼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였죠. 마찬가지로 B도 자신을 A가 조종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A의 투사는 B도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조종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A가 평소에 억눌러왔던 '나는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라는 무의식 속의 생각이 현실 속에서도 확인될 수 있게 만들었어요. 결국 A가 자신의 대인관계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가설이 A와 B 사이의 갈등 관계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한번 더 입증된 셈이에요. A와 B처럼 투사당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투사를 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이런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지 않습니다. 이처럼 투사적 동일시는 우리의 삶에서 아주 조용하게 진행되는데요, 정신분석적으로는 이것을 두고 '미묘한 심리적 압박'을 주면서 상대를 조종한다고 표현합니다.


  어떤 분은 투사적 동일시가 심리적 지배와 다른 것이지 않느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씀이기도 한 게, 이번에 보여드린 A와 B의 이야기는 결국 서로 손절하는 것으로 끝이 났죠.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심리적 지배라고 하면 정신적으로 부담을 받는 관계가 끊어지지 못하고 계속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A와 B의 이야기를 결말부분만 살짝 바꿔보겠습니다. B가 자신에게 떠넘겨진 부적절감과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지만, 자신을 의심하는 A에 대한 분노보다 A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불안이 더 컸다면 어떤 결말이 나올까요? 이 상황에서 B는 스스로를 '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B는 A가 아니라면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아 어떻게든 A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해요. 사실 B는 다른 사람에게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일 수 있는데, A가 자신에게 투사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인해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결국 B는 관계 내에서 반복적으로 착취당할지라도 A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못하게 돼요. 이렇게 결말이 마무리된다면 A와 B의 이야기는 심리적 지배의 흔한 예시가 될 수도 있겠죠.


만약 B가 A의 부적절감과 고립감을 투사당한 뒤에 불안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B는 관계가 단절되면 더욱 불안해질 것 같아 자신을 착취하는 A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심리적 지배(가스라이팅), 투사적 동일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모두 살펴보셨습니다. 결국 심리적 지배나 투사적 동일시나 한 사람의 부정적인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지는 과정들인 셈이에요. 이 과정들은 상당히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는 과정이기에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알아채기가 어려운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알아챘을 때는 이미 관계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경우가 적지 않아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원래 심리적 지배는 일찍 알아채기가 어려운 것이니까요. 소중한 여러분의 마음이 더 다치기 전에, 위험한 관계에 놓여있으시다면 최대한 빨리 나오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가스라이팅과 투사적 동일시는
일종의 남탓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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