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죽음을 생각해 본다면
2000년대 후반, TV에서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대세였다. 고정된 각본이나 연출이 아니었기에 출연자들의 자연스럽고 솔직한 모습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인기 많은 프로그램 중 자주 나오던 말이 있다.
“나만 아니면 돼!!”
벌칙과 자막, 복불복 게임이 재미있던 것과는 별개로 출연자들의 대사로 종종 치 않게 들렸던 그 말. 그걸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 불편함과 동시에 설명하기 힘든 감정으로 남았다.
“소대장님! 지뢰사고가 났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oo작전지에 xxx 하사가 지뢰를 밟아서 터졌답니다. 현재 헬기까지 떴다고 합니다!”
군 생활 당시에 벌어진 일이다. DMZ에서 작전 중인 같은 부대 분대장이 큰 비로 인해 유실된 지뢰를 밟았고 그 폭발로 다리 잃었다.
DMZ. 6.25 전쟁 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곳 중 하나인 우리나라와 북한 사이의 비무장지대를 부르는 말이다. 비무장지대지만 사실 이 안에 들어가는 군인들은 100% 전부 무장을 하고 들어간다.
보통 남자들이 군 생활을 하면서 지뢰 사고를 접하는 건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몇 다리 건너 들을만한 남의 이야기다. 나 역시 타 부대였으면 그 사고가 피부에 와닿진 않았으리라. 앞선 지뢰사고는 같은 부대원으로서 비슷한 임무를 하는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갖게 했다. 그것은 ‘조심해야 한다.’라는 습관적 다짐이 아니라 ‘그다음은 나일지도 모른다.’라는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그 사고 후 몇 달의 시간이 지났다. 소대원 한 명이 치아 때문에 얼굴이 붓는 바람에 휴가를 받았다. 의심쩍었던 몇 단계를 거친 상급병원 검사 결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백혈병이라는 믿을 수 없는 소리를 수화기 너머로 전해왔다. '얼마 전까지 함께 공을 차던 녀석이 백혈병이라고?' 멀리 있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상황이지만 며칠 전까지 함께 생활하던 전우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거짓말 같은 사실을 마주해야 할 상황이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무거운 생각들이 몸과 마음을 짓눌렀다. 이미 지뢰사고로 크게 놀란 데다 거짓말 같은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앞선 두 사건은 일상의 싱싱함을 파먹기 시작했다. 멍한 일상이 반복되던 중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군대에 갓 전입 왔을 당시 지뢰사고로 다리를 잃은 간부의 이야기를 들었던 때였다. 보자마자 겁부터 먹었었다. 그러나 곧 내 임무와는 상관없음을 알고 나서 마음을 놓았었다. 그랬다. 나 역시 '나만 아니면 돼!'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게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아는데 얼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전역을 앞두고 투입된 마지막 작전에서 나는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맞았다. 6.25 때 쓰던 대형 포탄이 우리의 수색로에서 발견된 것이다. 다행히도 그것은 불발탄이었다. 그 불발탄 주변에는 쓰지도 않은 포탄이 박스 더미로 남아있었다. 듣기로 그곳은 6.25 당시 치열한 전투 현장이라고 했다. 수색로에서 노출된 그 포탄을 발견했을 때의 그 순간 이후 머릿속은 죽음이란 단어로 가득 찼다. 임무를 하면서 수십 차례 그곳을 지났던 터였다. 그것이 만약 불발탄이 아니었다면 지금 내 다리는 남아있었을까? 지뢰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인정해야 했다. 죽음은 언제나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변인들에게는 사고와 질병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죽음이란 녀석은 내게도 멀지 않은 곳에서 나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따금 나타난다는 것을 겨우 알아챘다. 위 사건들은 삶의 본질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삶은 동전의 양면처럼 죽음과 언제나 함께 있다"는 말은 내게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마지막 작전 후 무사히 전역을 했다. 다행히도 난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았다. 제일 먼저 한 일은 군 생활 간 일어난 여러 사건을 되돌아보며 나는 삶의 우선순위를 진지하게 써 내려갔다. 그 이유는 주변을 통해 겪은 내게 멀지 않은 죽음이란 존재의 자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한 가지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했다. 삶이 게임이든 아니든 나만 아닐 수 없는 것, 바로 인생의 종착점이라는 죽음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고 반드시 겪는다는 사실이었다.
종교적인 이유로 죽음 이후를 막연하게 생각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죽을 때의 내 모습이 어떤 모양일지 생각해 본건 군대에서의 경험 이후가 처음이었다. 아주 살 떨릴 정도로 그랬다. 사고로 죽은 사람은 본인이 사고로 죽을지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나라고 해서 그 결과의 모습을 선택이라도 할 수 있을까?
본인의 삶을 복불복 게임처럼 산들 남들이 상관할 일도 아니고 관심도 없는 세상이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태도로 살든 말든 책임을 져야 하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다. 삶은 예능 속 게임이 아니니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난 삶을 복불복 식의 운에 맡기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누구나의 삶을 책임을 지는 존재는 나 자신밖에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