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스팔트 고구마 Mar 24. 2021

계획대로 될 리가 없지

죽음을 깨달았을 때 할 수 있는 행동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행을 이렇게나 좋아한건지 알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에게 로또 1등이 되면 뭘 해보고 싶냐는 질문에 순위는 바뀌어도 높은 비율로 나오는 응답 중 하나는 '세계일주'가 있다. TV 속 여행지의 멋진 장면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인지 단지 상상 속 이미지 때문인지 또는 진정 꼭 한번 해 보고 싶은 것인지는 몰라도 그 단어가 주는 느낌은 특히 실제로 꿈꾸는 사람에게는 설렘 이상의 감정이다. 내게도 '세계일주'는 두근거림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나라 로또 1등 당첨 확률이 약 팔백만 분의 일. 매일 로또를 추첨한다 해도 당첨되려면 무려 22315년을 살아야 한다. 로또 될 만큼의 시간을 사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내 인생 살아줄 것도 아니고, 딱 한 번만 사는 인생인데 세계일주 해 볼 순 없을까? 자랑을 위한 화려함 속 여행이 아니더라도, 내가 만족할 만큼의 현실적인 여행으로 떠날 순 없을까? 


 군대를 전역한 다음 날 여권을 신청하고 발급되자마자 바로 중국 여행을 떠났다. 군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보상이라 생각해서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그 여행은 시작부터 예상을 빗나갔다. 함께 티켓까지 예매해 놓고 같이 떠나려던 친구가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연락이 불가능했다. 결국 나 혼자 떠났다 돌아왔다. 당시 이메일조차 쓰지 않았던 친구 덕분에 계획을 급조해야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의 여행은 별다른 기억이 없다. 


 지나온 여러 인생 경험들처럼 이 여행도 그랬다.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직면한 것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던 집안의 경제적 사정이었다. 집이 넉넉하진 않았어도 길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군 생활 기간 이후 마주한 상황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부모님께서 사기를 당한 데다 고리의 빚까지 쓴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인들의 돈까지 끌어 썼다. 그 상황이 줬던 압박감은 너무 커서 당장 뭔가를 생각하기도 압도적이라 다른 생각하기가 힘들정도였고 가족 모두 짜증이란 통 안에 살고 있는것 같았다. 집안 분위기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현실 파악을 제대로 해야 했다. 2년이 넘는 시간의 수고는 불과 몇 초 만에 사라졌다. 군대서 모아놓은 월급으로 상황을 해결을 해보려 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는지 모른다. 당장에 취업 준비를 한다고 해서 언제 취직이 될지 알 수도 없었고 빚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답답한 현실의 벽이 컸었다. 한편으론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마치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게임 내 속절없는 장기말처럼 느껴졌기에 우울감은 깊었다.


 한국 사회 어디서나 쉽게 듣는 신파겠지만 우리 집 역시 극심한 가난에서 조금씩 나아진 상황이었다. 자유의 몸이 되어 다시 맞닥뜨린 경제적인 문제는 가족 구성원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숨긴 감정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한편 당시 내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던 죽음에 대한 생각과 한편으론 세계여행이란 욕망의 모순된 상상은 전역과 짧은 여행으로 재충전한 생기로움을 흔들었다. 생각하는대로 제대로 살려면 현실적이면서 새로운 행동이 필요했다.






 삶에서 좋은 걸 경험하기에 인간의 인생이란 왜 이런 걸까? 죽으면 끝날 일인데 그냥 죽어버릴까? 이렇게 살다가 괴로움만 느끼다 죽을 것 같아서 그리고 내 미래가 너무 뻔하게 느껴져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군대에서 생각해 본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살폈다.

 

 '나에겐 내 삶보다 중요한 게 없는데 남을 보고 주변을 살피고 있는 걸까? 뭘 당장 준비를 해야 하는 거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조금만 미루면 안 되나? 내 인생에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는데 원하는 거 먼저 하면 어때서? 미래에 준비할 뭔가는 도대체 뭐고 시기는 언제란 말이지?' 


 생각을 하다 보니 질문의 결이 바뀌었다. 미래에 뭘 해야 하고 할 수 있을지 나도 모르지만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조금만 미루는 걸로. 남들은 계획을 세우고 과정까지 어떻게든 잘 해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런 적이 별로 없다. 내가 살아온 인생은 노력과는 무관하게 과정에는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너무 자주 끼어든다. 그것은 계획과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때로는 자존감마저 뭉개버리기도 한다. 지금 당장의 계획도 어떻게 변할지 모를 일인데 한참이나 남은 미래의 일은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의 생각은 모이고 깎여서 내 결심을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득하게 생각하고 내린 결심이다. 내 맘대로 살아보는 거 지금 한 번만 해 보자.'


 전역의 자유함을 막 누리려 했건만 닥친 상황은 갑갑하고 우울했다. 그 우울감이 커서 당장에라도 안 좋은 선택을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살다 죽긴 싫었고 그래서 뭔가 현실적인 변화를 만들어야 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고 만약 정말 죽더라도 길에서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태어난 나라의 의무인 병역을 끝냈으니 이제 발목을 잡는 것은 없다. 내 인생인데 내가 원하는 거 하면 어때서?


 어린 시절부터 장기간 그리고 멀리 떠나고 싶었던 여행 바로 세계일주를 실행할 차례였다. 이것은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해 온 충동적인 결정도 아니었다. 이 여행을 떠나면 내가 어떻게 될지 나 역시 잘 모르지만 괜찮다고 믿었다. 여태까지 살아온 내 모습이 지금처럼 될 줄 알고 산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계획 없이 산 것도 아니었다. 가능한 선에서 내 삶에 최선의 선택을 안 한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아는 한 내 삶에 최선의 결과가 지금의 내 모습이다. 그리고 생각과 계획대로 산다한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야겠다. 정말 떠나야겠어.

이전 01화 나만 아닐 수 없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