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 검지를 대주세요.”
동사무소 창구에서 들려오는 안내음은 늘 일정하다.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기계적인 목소리. 마치 유리관 속에 가둔 목소리가 튕겨 나오듯 귓가에 닿았다.
나는 손끝을 유리에 올렸다. 차갑다는 느낌이 즉시 몰려왔다. 그 차가움은 단순히 손끝에만 머물지 않았다. 손끝에서 시작해 손바닥, 팔뚝, 어깨까지 얇게 번져나갔다.
잠시 초록 원이 화면 위를 돌았다. 이윽고 멈췄다.
“더 세게 눌러주세요.”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힘을 주어 손가락을 유리에 밀착시켰다. 살갗이 퍼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삑, 하고 짧은 소리로 돌아왔다.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오른손으로 바꿔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는 복사하듯 반복되었다. 화면에 떠오르는 글자는 단순한 실패의 문장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모른다고 선언하는 방식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손끝 무늬가 흐려진 것은.
나는 하루 대부분을 책상 앞에서 보낸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보고서를 넘기고, 프린트를 정리한다. 복사기에서 뜨거운 종이를 뽑아내고, 회의 자료를 꺼냈다가 다시 넣고, 회사 출입문을 하루에도 수차례 통과한다.
지문 인식기는 매번 나를 불러 세웠다. 서너 번은 눌러야 겨우 문이 열렸다. 처음에는 기계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손은 단 한 번에 인식되었다. 문제는 기계가 아니라 내 손이었다.
출근길에 문 앞에서 멈추는 일이 잦아졌다. 다른 사람들은 휙 하고 들어가는데, 나는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손가락을 눌러야 했다. 뒤에서 사람들이 기다릴 때면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조용한 한숨, 대수롭지 않은 기침 소리가 다 내게 향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순간마다 나는 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는 분명 뚜렷한 무늬가 있었다. 어린 시절 도장을 처음 배울 때, 선생님이 내 손을 잡고 “사람마다 무늬가 다르단다”라고 말했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무늬가 흐려져 있었다. 마치 지우개로 오래 문지른 종이처럼.
“물에 손을 불리면 선이 살아난다.”
어디서 들었던 말인지 확실치 않다. 오래전 회사 복도였을까, 아니면 퇴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였을까. 분명 누군가 무심히 흘리듯 말했었다.
나는 안내 창구에서 벗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긴 복도를 걸을 때마다 구두 굽 소리가 유리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 등을 따라오는 것 같아 일부러 천천히, 무심한 척 걸었다. 하지만 안쪽 문을 밀고 들어가자 특유의 화장실 냄새가 나를 맞았다. 소독약 냄새와 눅눅한 물비린내가 뒤섞인 공기였다.
세면대 앞에 섰다. 낡은 세면대는 군데군데 물때가 껴 있었고, 배수구에서는 금속과 곰팡이가 뒤섞인 듯한 냄새가 올라왔다. 나는 마개를 닫고 수도를 틀었다. 처음에 나온 물은 차갑게 튀었고, 곧 미지근한 온도로 바뀌었다. 물줄기가 세면대 안쪽에 모여들며 얇은 물막을 만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담갔다. 손끝이 물속으로 잠기자마자 차가움이 파고들었다. 마치 내 손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감각이 희미해졌다. 한참을 담그고 있자 피부가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물속에서 하얗게 일어나는 살갗을 내려다보며, 이게 정말로 선을 되살려줄까, 아니면 그저 허망한 기다림일 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속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연체동물처럼 힘없이 떠다녔다. 나는 무심코 왼손 검지를 꺼내 천장 불빛에 비춰 보았다. 피부가 약간 불투명해지며 희미한 줄기 같은 무늬가 드러나는 듯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그건 단순한 빛의 장난인지, 아니면 내 안의 바람이 만든 착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닦을 때조차 조심스러웠다. 종이 타월로 문질러 닦아내면 다시 선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저 눌러 물기를 옮겼다. 손끝에 남은 물방울이 천천히 스며드는 동안, 나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 행위가 허무한 짓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무언가 해봤다’는 기분. 그 작은 행동이 나를 버티게 해주는 듯했다.
거울 속 내 얼굴은 불안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하게 단호했다. 나는 다시 창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인식 중입니다.”
기계가 다시 말했다. 초록 원이 돌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깜빡이는 순간 선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더 짧았다. 실패는 두 번째부터 빨라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끝에는 잠시나마 무게가 실린 듯한 감각이 남았다. 마치 물속의 시간이 아직 완전히 증발하지 않은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니 어둑해졌다. 싱크대 앞에 서서 물을 틀었다. 하루 종일 만졌던 서류와 키보드, 프린트 가루들이 씻겨 내려갔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오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는 달랐다. 어깨가 아주 조금, 벌레 한 마리의 두께만큼 올라가 있었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오래 쓰던 볼펜을 꺼냈다. 노트 위에 내 이름을 적었다. 글자의 끝마다 작은 점을 찍었다. 지문 대신 오늘의 서명. 제출할 곳은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필요했다. 오늘 하루 내가 살아 있었다는 흔적.
사람이 살아가며 들고 다니는 것들 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무겁게 채웠다고 믿었는데 막상 열어보면 텅 빈 것도 있고, 아무것도 담지 않은 것 같아도 끝내 놓지 못하는 것도 있다.
내 손끝도 그렇다. 무늬는 희미해졌지만, 내가 지나온 날들이 분명히 남아 있다.
내일 아침, 나는 다시 유리 위에 손을 올릴 것이다. 오늘보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정확하게. 실패할 수도 있다. 어쩌면 잠깐 성공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표면 아래에서는 계속해서 선이 자라난다.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