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집

by 쪼교


며칠째 나는 같은 문 앞에 서 있다.
시립병원을 지나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이제는 지도에서조차 사라진 용두동 한옥거리가 떠오른다.
세 번째 골목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면 막다른 길. 그 끝, 마지막 집.


나는 오늘도 그 집의 문을 조심스레 밀어본다.

문이 열리면 작은 사각형 마당이 드러난다.
천장은 뚫려 있고, 벽의 문들은 모두 굳게 닫혀 있다.
뚫린 천장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는 생선을 굽는 듯한 비린내가 섞여 있다.
정면의 나무문은 반은 나무로, 반은 불투명한 유리창으로 막혀 있다.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한 풍경이다.


나는 매번 그 문을 열다 깨어난다.
열었는지, 못 열었는지 기억은 희미하다.
오늘만큼은 꼭 들어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손잡이를 잡고 옆으로 미는 순간, 그으윽― 하는 소리가 난다.
‘이번엔 끝까지 가보자’라는 생각이 스친다.


문 안에는 양쪽으로 방이 있다.
오른쪽은 불이 꺼져 있고, 왼쪽은 희미한 빛이 새고 있다.
나는 무릎에 힘을 주어 문지방을 넘는다.
나무 마루는 방금 닦은 것처럼 반짝인다.
하지만 반짝임 속에 오래된 습기와 냄새가 함께 묻어난다.
텅 빈 공간에 작은 요강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발로 툭 치자 안에서 묵직한 출렁임이 느껴진다.
누군가 이곳에서 살던 흔적이 아직 떠나지 못한 것처럼.


왼쪽 방으로 향한다.
문을 열기 전 잠시 두드린다.
이 집의 문마다 의식을 치르는 듯하다.
문은 가볍게 열린다.

방 안에는 오래된 자개장과 낮은 침대가 놓여 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눕다 일어난 듯 이불이 흐트러져 있고,
베개는 아무렇게 던져져 있다.
작은 화장대와 투박한 행거도 보인다.
화장대 위에는 쓰인 흔적 없는 화장품들이 뚜껑만 열린 채 놓여 있고,
행거에는 옷 한 벌 걸려 있지 않다.
대신 더러운 수건 몇 장이 걸려 있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스며든다.
사람 냄새와 세월의 냄새,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

구석에서 쉭쉭하는 소리가 난다.
소리를 따라가니 얼마 남지 않은 물을 간신히 토해내듯 내뿜는 가습기가 있다.
나는 그 가습기를 꺼본다.
적막한데도 더 적막해진다.

이 방에는 다급함이 남아 있다.
누군가 급히 떠난 흔적이, 서둘러 닫힌 공기의 결이 느껴진다.
방 주인은 곧 돌아올 것만 같다.

나는 왼쪽 방을 빠져나와 불 꺼진 오른쪽 방으로 간다.
문을 두드린 뒤 힘을 주어 연다.
문틈으로 짙은 어둠이 새어 나온다.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는다.
스위치를 올리자 노란 벽등이 켜진다.


희미한 빛 속에 책장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
그러나 책은 한 권도 없다.
이 방은 서재였을 것이다. 더 이상은 아니지만.
떠나간 누군가가 책을 모두 챙겨간 모양이다.
책장을 빈 채로 남긴 건 집보다 책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삶을 통째로 비워두고 싶어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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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방을 나와 마당 계단에 앉는다.
주위는 고요하다.
깊은 산속에 들어온 듯하다.
생선을 굽는 듯한 비린내만 여전히 떠다닌다.
인기척을 내보려고 헛기침을 해보지만, 소리가 나지 않는다.
맞다. 이곳은 꿈속이다.
꿈에서는 기침도 할 수 없는 건가 보다.


고요를 견디지 못해 깨어나기를 기다려보지만, 오히려 더 깊이 빠져드는 듯하다.
현실인지 꿈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진다.
현관문 옆의 작은 손님방.
나는 방문 앞에 다가가 문을 두드린다.
안에서 “네”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한숨을 크게 쉬고 문을 연다.


“실례했습니다. 사람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방 안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나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소리 없는 헛기침을 해댄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버지 목소리와 닮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 집에 들어와 보고 싶었습니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한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조금 늦은 것 같군요.”

나는 고개를 떨군다.

“어쩌겠습니까. 이제는 익숙해져야 하니까요.”
“그래요. 익숙해져야겠지요.”


방 안은 적막하다.
사람이 있는데도 그렇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꿈속에서의 모든 것이 낯설다.
자개장도, 책장도, 침대도, 행거도, 화장대도,
생선 굽는 비린내까지도.
그리고 남자 혼자 남은 이 집까지도.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연다.
검은 비닐로 꼭꼭 싸맨 음식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비닐을 하나씩 풀자 냉동 멸치, 냉동 생선, 냉동 돼지고기, 냉동 찌개, 냉동 야채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나는 이 집에 살던 누군가가 끓여놓은 보리차를 꺼내 들이킨다.
걸쭉하고 특유의 쉰 맛.
내가 잠에서 깰 때마다 늘 냉장고 문을 열고 벌컥벌컥 마시던 그 보리차 맛이다.
집을 떠나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온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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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다.
내 방은 따뜻하고 고요하다.
하지만 꿈속의 고요함과는 다르다.
낯설지가 않다.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인기척을 느낀 보리가 슬그머니 내 배 위로 올라온다.
부드러운 털의 온기가 배를 덮자, 나는 방금 전 꿈속의 마당과 방과 냄새들을 천천히 떠올린다.

꿈은 사라졌지만, 그 안에서 만난 집과 냄새와 목소리가 나를 오래된 기억 속의 어느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지점에서, 나는 문득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그 문을 열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그 집은 내 마음속에서만 남아 있는 걸까.

보리는 내 배 위에서 작은 숨결을 내뱉는다.
그 숨결이 마치 그 집의 보리차 향처럼 내 안으로 스며든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보리를 쓰다듬는다.

내 방은 고요하지만, 이제는 그 고요 속에 작은 따뜻함이 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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