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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교 May 29. 2024

숲에 가는 남자


그는 정수기에서 물 한 잔을 더 내려 마시고 부엌을 둘러보았다. 그릇장에서 대충 꺼내놓은 그릇들이 모양별로 분류되어 있다. 둥근 것은 둥근 것들끼리, 각진 것은 각진 것들끼리 모아두었다. 윤이 나게 닦은 주방도구들도 식탁 위에 종류별로 늘어두었다. 선물로 받은 은식기와 커피머신이 그 앞에 놓여있었고, 그것들에 방어벽이라도 치듯 그가 즐겨마시던 와인 병들이 식탁 끝에 줄지어 서 있었다. 물건들이 제 자리를 벗어나 있을 뿐인데, 부엌은 이제 더 이상 부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진열장이 되고 말았다. 


 그는 물잔을 들고 침실로 갔다. 침실에 들어서면 그는 기존의 방향감각을 잃는다. 한가운데 침실이 놓여있고, 그 양 옆은 그가 눕는 쪽과 그가 눕지 않는 쪽으로 나뉠 뿐이다. 그가 눕는 쪽에는 침실용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독서등이 세워져 있다. 그가 눕지 않는 쪽에는 읽으려고 사두었지만 읽지 못한 책들이 쌓여있었다. 그가 눕던 쪽, 그가 눕지 않던 쪽. 그의 침실은 그를 닮았다.


 서랍장은 침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놓여있었다. 그는 그날 아침 서랍을 비우고 옷들을 꺼내 거실 한쪽에 쓰임에 따라 정리했다. 출근복, 외출복, 등산복, 실내복... 작은 방에서 책상과 책장을 꺼내와 거실 소파 옆에 놓아두었다. 책장 위에는 역시 읽지 않은 책들을 쌓아두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읽은 책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버렸다.


 그는 전자제품들을 모두 꺼내와 거실 한가운데에 놓아두고 코드를 꽂아두었다. 언제든 작동할 수 있게 말이다. 물건들은 제자리에 있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상관없이 작동한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도 그랬으면 했다. 

 그는 팔려는 물건들을 하나씩 사진을 찍었다. 가능하면 새것처럼, 가능하면 낡아 보이지 않게 말이다. 그리고 당근마켓에 하나씩 상품화시켜 올렸다.


- 상품명: 맥북 에어

-구입일: 2023년 10월

-상태 : 최상급

-사정상 아주 저렴하게 판매합니다. 좋은 기회 놓치지 마세요.

-가격 절충 가능

-장소: 장미 아파트 1동 603호


물건을 올리고 10분도 안 되어 알람이 울렸다. 당근! 당근! 물건에 관심 있다며 지금 당장 방문하겠다고 했다.

떠나야 하는 것. 떠나보내야 하는 것. 


그는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그가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쳐다보았지만 속도를 늦춰주는 차들은 없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나라도 늦출 이유는 없겠지!“


핸드폰에 요란스러운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지금 집앞에 도착했으니 올라오겠는 내용이었다. 잠시 후 20대로 보이는 남녀가 들어왔다.


"너무 어두워." 여자가 말했다.

"아! 조용히 해." 남자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얼른 거실등을 켰다. 형광등 불빛에 비친 남자와 여자는 더 앳되어 보였다.

 "편히 보세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일인 소파에 앉아 몸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남자와 여자는 주춤거리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여자가 남자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얼마인지 물어볼까?"

 "노트북도 물어봐". 남자가 말했다.

 "오빠가 물어봐." 여자가 말했다.


 두 사람은 각각 원하는 물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자는 그릇들과 주방기기들을 만져보고, 남자는 선풍기와 청소기가 작동되는지 눌러보았다. 선풍기가 작동되자 가라앉혀있던 먼지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남자는 억! 하며 당황하는 소리를 내었다. 여자는 유리그릇들을 이리저리 형광등에 비춰보며 깨진 곳이 있는지 보았다. 그리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앉아 남자를 불렀다.


"오빠! 이리 와봐" 여자가 말했다.

남자와 여자는 침대에 앉아 엉덩이를 들썩이며 뛰었다.

"어때? 좋아?"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침대 위에 올라가 뛰었다.

"어떠냐고?"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씩 웃더니 침대에 누워 독서등을 켰다.

"어때 침대에 누워 독서하는 자세, 지적이지 않아?"

남자는 별 이유 없이 깔깔대며 웃었다. 뭐가 웃기는지 여자도 따라 웃었다.

"가서 얼마인지 물어봐. 그리고 깎아달라고 해. 원래 깎고 사는 거야." 여자가 말했다.

"틀림없이 돈이 절박해서 파는 걸 거야. 싸게 달라고 해"

"아 노트북도 좋은데..." 남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물어보라고, 모두.”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그에게 다가갔다. 남자가 말하려 하자 그는 남자의 말을 먼저 낚아채 물었다.

 "뭐가 마음에 들어요? 물어봐요" 그가 말했다.


 “아 네. 침대하고 노트북이요. 그리고 다른 것들도 사면 싸게 해 주시나요?" 남자가 말했다.

 “네. 침대는 얼마에 생각하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10만 원이요. 아. 아니 15만 원에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가 자신 없게 말했다.

남자는 여자와 있을 때와 다르게 수줍어했다.


“10만 원은 곤란하고 15만 원에 해드릴게요 대신 다른 것도 사시면 더 싸게 해 드릴게요" 그가 말했다.

그때 여자가 침실에서 뛰쳐나와 말했다.

“그럼 침대도 살게요”

“모두 30만 원 어때요”그가 말했다.

“20만 원에 해주세요. 다른 거 사면 싸게 해 준다고 했잖아요?" 여자가 당돌하게 말했다.

그는 피식 웃었다. 여자는 긍정의 뜻으로 이해한다며 활짝 웃었다.


 그는 와인 한 병을 들고 일인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남자와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가 식탁에 진열되어 있는 와인잔에 눈길로 신호를 주자 남자는 와인 잔 두 개를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여자는 식탁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그는 남자와 여자의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켰다. 그가 아무 소리 없이 텔레비전을 뚫어지게 보고 있자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다.


 "우리 텔레비전도 살까?"

 "저건 얼마예요?" 남자가 말했다.

 "원하는 가격을 말해봐요" 그가 말했다.

 그는 와인잔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민하는 그들을 보았다. 기대에 찬 표정 같기도 하고, 심술궂은 표정 같기도 했다. 여자가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주변을 더 둘러보았다.


 "원하는 거 말해봐요. 싸게 줄게요. 모두 팔 거예요" 그는 말했다.

 여자는 잠시 멈칫하며 와인잔을 내밀었다. 그가 말없이 와인을 따라주었다.

 "여기 있는 모두 100만 원에 해주세요" 여자가 말했다.

 여자의 눈은 긴장한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남자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 머리를 긁적이며 와인을 한 번에 훌쩍 마셨다.


 "오케이" 그가 말했다.


 남자와 여자는 복권에 당첨된 듯 서로 손을 붙잡고 방방 뛰었다.


 그는 축하의 의미로 와인을 더 마시자고 했다. 남자와 여자는 활짝 웃으며 와인잔을 치켜들었다. 그는 음악을 틀고 아파트만 보이는 창밖 전경을 바라보았다. 침묵이 어색해질 때쯤이었다


"어디 멀리 가시나 봐요?" 여자가 물었다.


"숲에 가요" 그가 말했다.  


 젊은 남녀는 그가 숲으로 간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했다. 놀라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숲에 가면 맥북이나 침대, 믹서기는 필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와인잔도 전혀 필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오늘의 거래에 무척 만족했다. 이런 행운은 쉽게 얻어걸리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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