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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사과 김진우 Oct 22. 2023

그들의 워라밸을 응원한다

나의 트레이너는 최근 운영하던 체육관을 동료에게 넘기고, 이제는 트레이너로 수업만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나 사연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지만, 이후 삶의 질이 높아져서 만족스럽다고 한다. 중간중간 나누는 짧은 대화로 유추해 볼 때 그는 여행, 음식, 영화 등을 즐기며 여유롭게 사는 사람 같다.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내가 모르는 충주의 맛집, 커피숍, 커트 잘하는 미용실, 걷기 좋은 길, 경치 좋은 곳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다. 그가 어떤 주말을 보냈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쏟아진다.     

 

내가 아는 치과의사는 10년 전 제주도로 이사하였다. 몸이 약한 둘째가 병원 치레를 오래 했던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개업했고 좋은 차와 좋은 집에서 소위 성공한 삶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제주도의 많은 개인병원이 그러하듯 그의 치과도 아침 10시에 문을 열고 오후 4시면 문을 닫는다. 주말에 쉬는 것은 당연하다. 날씨가 너무 좋으면 그냥 문을 닫기도 한다. 제주로 내려간 이후 느려진 삶의 속도만큼 가족의 모습은 평화로워 보였다.      


충주 연수동에 작은 빵집이 있다. 좌석 없이 판매만 한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도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으면 헷갈릴 정도로 외지고 뜬금없는 곳에 있다. 우리 밀, 치즈, 블랙 올리브 등 사용하는 재료의 퀄리티가 최상급이다. 빵의 종류는 단순하다. 프랜차이즈 빵집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담백한 식전 빵과 샌드위치다. 빵들이 주인공이라는 듯 인테리어에는 돈 한 푼 쓰지 않았다. 이 가게는 주 4일만 영업한다. 여름 성수기, 연말연시에는 10일씩 문을 닫는다. 오전 11시에 오픈하며 2~3시간이면 다 팔린다. 인스타그램 디엠으로 예약을 받기 때문에 인기 종목은 선점된다. 지나가다 우연히 들려서는 원하는 빵을 살 수 없다. 미리 주문해도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한다.      


충주에서 수안보 가는 길, 신대마을회관 방향으로 꺾어 800m 정도 쑥 들어가면 허름한 중식당이 하나 있다. 해산물 듬뿍 덮인 뽀얀 국물의 소마면과 수북한 탕수육이 별미다. 지역에서는 제법 입소문이 나 있었는데, 몇 년 전 TV 프로에 소개되면서 전국적인 맛집이 됐다. 예약을 받지 않으니 문을 여는 시간에 가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전 11시경 문을 여는데 오후 2시만 넘어도 당일 재료 소진으로 영업 종료다.     

장사가 너무 잘 돼서 충주 사람도 그 집 소마면 먹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올 무렵, 나는 궁금했다. 과연 그들은 가게를 확장할 것인가? 공간을 업그레이드할 것인가? 모처럼 찾아갔다가 못 먹고 돌아설 때면 제발 좀 그랬으면 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는 '그렇게 하지 않음을 선택'했다. 장사가 잘되면서 그들의 표정은 밝고 건강해 보였다. 짧게 효율적으로 일하고 효과적으로 쉬는 것이다.           

그들의 선택이 고맙다. 횟수는 줄었지만 운 좋게 식당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으면 행복하다. 소마면과 탕수육은 이전보다 더 만족스럽다. 회전이 빠르니 재료가 신선해서겠지만 심리적 요인도 크다. 귀하게 얻은 기회이니 알뜰히 즐긴다.         

  

코펜하겐에서 공부하던 1990년대 중반, 처음 며칠간은 모든 것이 불편했다. 가게 대부분이 오후 5시면 문을 닫았다. 내가 공부하던 학교의 직원들은 오후 3~4시면 퇴근을 했다. 금요일에는 최소한의 직원만 있었고 그나마 오전 근무만 했다. 근무를 마친 후에는 바닷가에 있는 주말 주택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다.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과 배달 음식이 당연하고, 주말이나 휴일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던 나와 미국 친구들은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사냐며 툴툴거렸다.     


물론 코펜하겐은 사람이 사는 데 아무 문제없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적게 일하는 나라일 뿐이다(첫 번째는 독일). 우리는 차츰 그들에게 적응했다. 조금 익숙해지니 휴일에 돌아가면서 늦게까지 문을 여는 슈퍼마켓, 약국, 편의점 등이 보였다. 미리 장을 보는 습관을 들였다. 1990년대 중반 우리나라와 덴마크의 삶의 질은 달랐다. 2023년 지금 대한민국은 이제 덴마크와 별 차이가 안 난다. 한스 로슬링의 책 <팩트 풀니스(Factfulness)>와 갭 마인더(www.gapminder.org)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이미 많은 지수에서 4단계(선진국)에 해당한다. 덴마크와 같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OECD 국가 중에 노동시간이 최상위인 나라다. 생산성은 하위권이다. 오래 일하고 효과가 별로인 것이 아니라, 오래 일하기 때문에 효과가 별로이다. 그렇다면 이제 좀 덜 일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주 6일제를 경험했던 50~60대가 주 4일제를 반대한다는 통계가 있다. 왜 그럴까? 성실함은 미덕으로, 게으름은 부덕으로 배우고 자란 탓이다. 제대로 놀고, 쉬고, 자고,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 의미와 가치를 체감한 적 없었다. 한 달씩 휴가를 가는 바람에 7월의 파리에는 파리지앵이 없다는 사실은 부러워하면서도,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가 그런 긴 휴가를 간다면, 특히 젊은 세대가 그렇다면 50~60대의 반응은 뻔하다. 요즘 젊은것들, 팔자 좋네, 제정신인가.      


나는 내 이후 세대가 나보다는 덜 일 하고 더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란다. 나의 트레이너처럼 조금 일하고 (상대적으로) 적게 버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으면 좋겠다. 보란 듯이 문을 닫고 휴가를 가 버리는 '불편한 가게'가 우리 동네에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경제지표가 국내외적으로 최악인데 뭔 소리냐고 호통 치는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경제가 좋았던 적이 언제 있었냐고. 무한증식과 축적만이 본질인 자본에 만족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최소한 워라밸을 추구하는 그들을 비웃거나 방해하지 말고, 장노년층은 지금이라도 노는 것을 배우자. 몸이 부서지라고 일만 하다가 어느 날 돌아보니 친구도 취미도 없는 쓸쓸한 노인이 되어 100세를 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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