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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 사과 김진우 Oct 22. 2023

신뢰 사회

잠깐 한국에 온 미국 친구와 체육관에 들렀다. 겉옷, 핸드폰, 자동차 열쇠, 가방 등을 체육관 입구 선반에 두는 나를 보더니, 미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다며 깜짝 놀란다. 한여름 더위에 창문을 조금씩 열어두고 주차를 했더니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조카는 괜찮겠냐고 물었다. 맞아, 그렇지, 언젠가부터 우리는 공공장소에 개인 물건을 두는 것이 불안하지 않다. 누군가가 주차된 차를 부수고 물건을 가져갈 거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미국은 물론, 한때는 우리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독일이나 북유럽 국가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고 느낀다. 촘촘히 설치된 CCTV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분명 우리 사회의 신뢰도가 높아졌다. 생각해 보면 4~5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맘 편하게 공공공간에 개인 물건을 두지는 않았다.      


1994년 여름, 나는 덴마크에 있었고 이미 그들은 안정된 신뢰 사회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걸 실감하게 하는 사례는 매일 등장했다. 예를 들면, 함께 갔던 동료 교수가 뮤지엄 레스토랑에 지갑을 놓고 왔다. 우리는 당황했고, 다급하게 덴마크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친구는 동요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레스토랑으로 전화를 걸더니, 그곳에서 지갑을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지금과는 달리 현금이 제법 들어있던 지갑이었는데, 지갑은 몇 시간 만에 10원 한 장 없어지지 않고 주인 손으로 돌아왔다.      


당시 내가 했던 경험은 우연이나 예외적 상황이 아니었다. 1996년, 크리스티안 비외른스코우 교수는 여러 도시에 지갑을 떨어뜨린 뒤 몇 개가 돌아오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그는 사회적 신뢰, 주관적 행복감, 생활 만족도 분야의 전문가다. 비외른스코우 교수 실험 결과 도시의 신뢰 수준이 높을수록,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많을수록 더 많은 지갑이 돌아왔으며, 가장 많은 지갑이 돌아온 나라는 덴마크와 노르웨이였다.      


또 하나의 사례는 지하철 승차장이다. 세계 여러 나라 지하철 승차장에는 다양한 형태의 개찰구가 있다. 그중에는 개찰구 자체를 없애버린 도시가 있다. 코펜하겐의 지하철에도 개찰구가 없다. 별다른 검열 장치 없이 바로 승차장으로 내려갈 수 있다. 개찰구가 없는 승차장은 넓고 시원하다. 장애를 가졌거나 자전거, 유모차, 큰 여행 가방과 함께 여행하는 승객에게는 훨씬 편리하다. 출퇴근 시간에도 병목현상이 거의 없다. 이렇게 장점이 많지만, 문제는 무임승차의 우려와 그 비율이다.      


어느 나라에나 일정 비율로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이 있지만, 코펜하겐시는 개찰구를 설치하지 않았다. 일단 사회적 시스템은 양심적으로 승차하는 대다수 시민을 기준으로 만든 다음, 이를 악용하는 사람을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다. 불시에 승무원이 검표하고, 만약 적발되면 비용의 수십 배에 이르는 벌금을 내야 한다.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코펜하겐에서 나는 종종 티켓 구매를 잊었다. 핑계가 될지 모르겠지만 안 되는 영어로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지하철을 탈 때, 막아서는 장치가 없으니 의식을 못 했다. 1990년대 나의 몸은 개찰구의 삼단 몽둥이를 통과하지 않으면 열차를 탈 수 없던 서울 지하철의 시스템에 적응되어 있었다. 다행히 적발되지는 않았지만, 등골이 서늘하고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덴마크 친구들이 한국 사회의 높은 신뢰도에 놀란다. 늦은 시간에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등산로와 산책로, 깨끗할 뿐만 아니라 무료로 열려있는 공중화장실, 노트북을 두고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카페 등.     


신뢰 사회는 왜 중요한가? 신뢰 사회는 구성원에게 정서적인 풍요로움을 주고 필요한 순간에 서로를 결속시킨다. 이는 일상 속 행복감과 관련이 있다. 매 순간 옆에 있는 누군가를 의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면 그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치안이 불안한 나라를 여행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나아가 신뢰도는 경제적 성공에도 이바지한다. 코펜하겐 지하철은 개찰구 설치 대신 시민을 믿기로 하면서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비외른스코우의 계산에 따르면 덴마크 사법부는 그들이 구축한 신뢰 덕분에 매년 1인당 1만 5천 크로네(287만 원)를 절약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덴마크 경제의 25퍼센트가량을 사회적 자본이 차지한다고 믿는다. GDP의 상당한 부분이다. 제법 큰 사회복지제도의 비용을 충분히 감당할 만한 비율이다.(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마이클 부스, 64쪽)”     


하지만 신뢰 사회는 그냥 되는 게 아니다. 화초처럼 늘 가꾸고 돌봐야 한다. 잠시만 방심하면 죽어 나간다. 그리고 그 비용은 그 사회에 사는 모두가 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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