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네이버 블로그 자댕(자씨네 댕발소. https://blog.naver.com/wewe101025/220805300844)
이것은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어릴 때이니, 단 것, 과자 좋아하고 군것질 많이 할 때이기도 했고, 식성도 좋아 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넣어보곤 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렇게 많이 먹은 만큼 이빨도 빨리 상했다. 나는 충치를 달고 살았었는데, 하루는 딱딱한 과자(과자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서양과자였던 걸로 기억한다)를 어금니로 씹다가 우두득하는 소리와 함께 이빨의 일부분이 떨어져 나왔다. 나는 아픔을 간신히 참고 엄마에게 달려가 이빨을 보여주며 "엄마, 이빨 빠졌어." 하고 말했다. 엄마는 나더러 아 해 보라고 하더니, 입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런, 이빨이 부러졌구나." 하고는 나를 치과에 데리고 갔다. 치과의사 선생님은 남은 치아를 빼고 그 위에 가짜 치아를 씌워주었다. 물론 악몽 같은 신경 치료를 했던 건 덤이다. 그때, 치과에서 뺀 내 이빨과 과자 먹다 부러진 이빨 조각을 맞춰서 "까치야, 까치야. 헌 이 줄게, 새 이 다오." 노래를 부르며 지붕 위로 던졌더랬다. 빠진 이가 영구치라서 새 이가 날 일은 없었지만, 으레 이가 빠지면 부르던 노래라 어린 마음에 아픔을 달래기 위해 불렀던 것 같다. 아무튼 그 노래를 부르면 헌 이가 가고 새 이가 오듯이 내 이가 새로워질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여러분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위 새로움에 대한 것이다. 요즘 보면 새로운 것, 다르게 말하면 신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어딜 가도 신상이나 트렌드 얘기가 빠지지 않고 있다. 하기야 기술의 발달로 세상이 너무나도 빠르게 바뀌고 있고,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지구촌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새로움을 지향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수록 옛 것, 헌 것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무기가 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얼마 전부터 K-드라마, K-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면서 전 세계인들의 관심이 한국에 쏠리고 있다. 특히, 킹덤이나 오징어 게임 등의 한국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는 드라마들이 호응을 얻으면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는 한국어, 한국 전통문화, 한국의 역사까지 배우려고까지 하고 있다. 킹덤, 오징어 게임과 같은 드라마들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들이 성공한 것은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성과 특수성이란 무엇일까. 전 세계인들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관과 한국 고유의 문화적인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박애와 정의, 평등을 지향하면서도 한국의 문화가 그 안에 스며들도록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갓이, 오징어 게임의 놀이들이 외국인들의 인기를 얻은 것처럼, 우리 고유의 문화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유는 우리의 과거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킹덤은 조선시대라는 포맷은 유지하면서 그 포맷에 서양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좀비와 추리를 결합했다. 오징어 게임은 과거 어른들의 놀이들이라는 포맷은 유지하면서 그 포맷에 서양에서도 자주 회자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추리를 결합했다. 그야말로 옛 것과 새 것의 결합인 것이다.
새로운 것만 좇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과연 여러분이 좇는 새로움이 언제까지 새로운 것일까. 하루가 지나면 금세 옛 것이 되지 않는가. 지금 우리 시대에 해야 할 발상은 틀에 박힌 새로움을 좇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재해석하고 과거를 통해서 배우고 과거를 거울 삼아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진정한 의미이며,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일 것이다.
단지 옛 것은 고루하다라고 하기에는 우리나라의 옛 것 중에서 뛰어난 것들은 너무나 많다. 고려시대의 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이 그것이요, 조선시대의 경복궁과 조선왕조실록이 그것이요, 김광석과 김현식의 노래들이 그것이다. 그 밖에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유적과 유물들, 위인들, 예술가들이 있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부터가 우리의 옛 것을 소중히 여겼으면 한다. 미국, 유럽에서는 서로 자신의 역사가 위대하다고 자랑하는 와중에 우리나라만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고 자꾸 새로움이라는 틀 뒤로 감추려 든다. 이것은 부끄러운 행동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 활동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움도 옛 것을 모방하고 실패하면서 새로워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플라톤이 있었고, 플라톤에게는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선배, 선생님, 즉 옛 것이 존재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배웠고, 배우면서 나만의 것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서양 사회를 통해 배우고,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틀에 박힌 새로운 것에 속아 무궁무진한 옛 것을 잃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