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겨울의 시작
김애란의 <입동> | 소설 감상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사건. 우리는 그 사건을 '세월호 참사'라고 부른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귀한 목숨을 잃어 바라보는 이들의 안타까움과 놀라움을 자아냈던 세월호 참사. 우리는 지금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사람들은 처음에 어린 학생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애도했다. 직접 안산의 단원고를 찾아 애도를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가면서 애도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는, 유가족들만 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애도를 지켜보면서 그만 털고 일어나라며 채찍질을 해댔다. 그것은 유가족들에게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우리는 위로라는 미명 하에 실제로는 유가족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던 것이다.
《바깥은 여름》의 첫 번째 소설, <입동>에는 그런 세월호를 대하는, 시대의 아픔을 대하는 작가의 자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설 속에서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서 숨"진 아이를, "그 단순한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던 '나'와 아내의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김애란만의 세련된 문체로 전달한다.
김애란은 아픔을 '아픔'이란 글자 그대로 표현하지 않고, <입동>이라는 서사 속에 기민하고 유려한 문체로 고스란히 녹여내었다.
어떨 때는 직설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단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는 그 단어가 지닌 힘을 믿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자연과 살아있는 것들로 자주 인물의 감정을 빗대어 표현하는데, 그 표현법이 매우 설득력이 있고,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김애란의 글을 읽다 보면 리듬감을 타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김애란이 가독성 있는 문장을 쓰는 데 매우 뛰어난 작가임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가독성 있는 글을 알고, 가독성이 어떻게 잘 구현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작가이다.
이제 서사 안으로 들어가 보자. 아이를 사고로 잃고 아내의 일상은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이 아니게 되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느낌,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주위의 것들은 아내만 놔둔 채로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없는 '나'와 아내를 향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어린이집 사람들과 어린이집 차량 보험회사 직원은 "운전사를 바꾸고 당시 현장에 있던 보육교사까지 잘랐는데 무얼 더 바라느냐" 묻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예의가 없었으며, "사무적인 얼굴"로 '나'의 슬픔을 대면했고, 주변 동네 사람들은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자식 잃은 사람도 시식 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무슨 반찬을 사고 어떤 흥정을 하나 훔쳐"보는 것 같았다. 또,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슬픔을 거두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작년 봄에 현재 집으로 이사 오면서 많은 것들을 꿈꿨다. '나'의 표현대로라면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씨앗에서 갓 돋은 뿌리 한 올이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안에 고스란히 전해"졌을 느낌.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고,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이 들었고,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안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몰려왔"던 느낌. 이러한 느낌들로 표현되는, 사는 것이 불안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자부심과 안도가 느껴지는 가장의 삶. 아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결혼 후 난임 치료를 받다 두 번의 유산 끝에 영우를 가졌고, 다섯 번의 이사 끝에 집을 샀"기에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해서 그렇게 거실과 부엌 등 인테리어에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두 부부와 아이가 살 정착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러나 그렇게 정성을 쏟은 나의 아이가 한순간의 사고로 내 눈앞에서 영영 사라졌다. "무슨 수를 쓴들 두 번 다시 야단칠 수도, 먹일 수도, 재울 수도, 달랠 수도, 입 맞출 수도 없는 아이"를 보내며 아내는 "'잘 가'라 않고 '잘 자'라 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양손으로 사진을 매만지며 그랬"던 아내가 어머니가 청소하다 "집 앞 어린이집에서 보내온 복분자액"이 올리브색 벽지에 튀자, 모든 게 "다 엉망이 되어"버린 듯 화를 내며 좌절했다. 그런 아내가 도배를 하자고 하자, '나'는 "흰 꽃이 자잘하게 돋은 벽지"를 사서 아내와 함께 도배를 하는데, 아내가 아들 영우가 쓴 "제 이름"을 보고 오열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을 따라 하며, "부엌 바닥으로 굵은 눈물방울"을 떨구었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 손에서 벽지를 놓을 수 없어, 그렇다고 놓지 않을 수도 없어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었다."
서사에는 영우를 잃고 그 슬픔을 감내해 나가는 '나'와 아내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슬픔을 감당해 나가려고 노력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잔혹하다. 예의 없는 어린이집 사람들이나 사무적인 어린이집 차량 보험회사 직원, 남의 이야기를 가십거리로 삼아 수군거리는 동네 사람들이 그렇다. 그 시선들이 마치 "꽃매"를 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버티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라고 아내가 말하듯 이들의 아픔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들 자신만이 알 뿐이다.
그 슬픔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애도하는 이들의 곪아 터질 대로 곪아 터진 마음을, 특히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가 이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이들이 피해 보상을 받는 것조차 배가 아픈, 뒤틀린 우리가 아니던가. 우리들은 이들의 슬픔에 성의 없이 예의 없이 대하고, "사무적인 얼굴"로 대하며, 하나의 가십거리로 대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슬픔을 대해야 할까. 최소한의 진정성 있는 예의로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슬퍼하는구나, 하고. 그럴 때에는 성의와 예의 없는 위로를 건네지 말고, 그저 슬픔을 슬픔이라고 받아들여줘야 한다. 내가 느낄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지 말고, 애도하는 이들에게 회복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그저 슬픔을 느끼는구나, 하고 멀리서 소리 없이 바라봐주는 것이다.
김애란 작가였다면 어떻게 말했을까. 상처에 대해 상처를 어떠한 다른 상태로 인위적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 그것만으로도 되었다고 할까. 그리고 김애란이 얘기하듯 "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던 그들의 입동을 우리는 기억해주어야 한다. 그 기나긴 겨울의 시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