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구성의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 중에서 인물에 가장 초점이 맞춰져 있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여자'라는 인물의 성격이라든가, 가치관, 신념 등을 배려심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았다. 배려, 친절, 오지랖, 예의, 매너, 체면 같은 여러 말들이 있지만,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률처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들 간의 암묵적인 동의, 의례 통상적인 사회 유지 장치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암묵적인 동의 또는 통상적 사회 유지 장치들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묻는다면 답은 아마도 "No."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보다 훨씬 강제적인 사회 유지 장치인 법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출현 이후,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이해하기 어려워지면서 우리는 사회를 유지시킬 수 있는 체계들을 만들었다. 그 중 하나는 국가이고, 또 하나는 법이다. 국가와 법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법(천부인권을 비롯한)이 만들어졌고, 법은 그 국가의 핵심 시스템(소프트웨어)이다.
그렇다면 배려, 친절, 오지랖, 예의, 매너, 체면 등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것은 수 천년을 거슬러 인류가 생기고 사회가 만들어지면서 굳어진 일종의 사회 질서 또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질서는 시대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해왔고, 지금도 지역에 따라 변해가고 있다. 이곳에서 예의인 것이, 저곳에서는 무례한 것이 되는 세상 말이다.
그런데 여기 이 질서가 변하지 않는 여자가 있다. 아니, 이 질서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여자가 있다. 모든지 예의를 지키려 하고, 배려하고 친절하며, 오지랖을 부리고, 매너 있게 행동하려 한다. 그러나 이 여자가 그렇게 행동하면 사람들은 질겁을 하고 도망간다. 가까이 오려 했던 사람도 부담을 느끼고 떠나간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배려하고 지나친 오지랖을 부리는 이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무례하고 무책임한지, 왜 자신의 배려에 부담을 느끼는지, 왜 사람들이 자신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지 말이다. 여자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고, 착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고,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자의 본심을 이해하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자만큼 사소한 배려심을 타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자보다 덜 민감하며, 남들에게 덜 신경 쓰며, 오히려 남들보다 자신을 더 먼저 생각한다. 그러니, 여자의 사소한 배려심, 오지랖, 이타심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살아온 대로 살아갈 뿐이다. 심지어 법만 어기지 않는다면 자신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냐고 말할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까짓 남들에게 이타심을 보이는 것보다 내 돈, 내 시간, 내 울타리만이 보일 뿐이라며.
그러나 여자는 세상의 것과 다르게 외치고 다르게 행동한다. 어떻게 보면 여자가 2천 년 전에 태어났다면 예수님 저리가라 할 만큼 엄청난 선행으로 무수한 제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지 않았을까. 어쩌면 여자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은 아닐까. 질서가 아직 지금처럼 변하지 않았을 때, 예의와 배려, 친절, 오지랖, 매너, 체면 같은 것들이 세상의 법처럼 널리 퍼져 있을 때 태어났더라면 여자는 성자처럼 대우 받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여자는 그때의 예수님이 그러셨듯 십자가에 못 박혀 또 한번의 시련을 겪었을까. 그것은 상상에 맡길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있다. 사회의 복잡한 체계들이 여자와 같은 부적응자를 만들어 낸 것인지, 경쟁에서 도태되고 낙오한 자들만이 사회의 체계에 부적응하고 있는 것인지. 여자와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각박한 사회가 문제일까. 아니면 사회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튀는 행동을 일삼는 그들이 문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