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4년 가까이 만난 나이 든 애인이 있다. 30대 중반이 된 나보다 거의 30년을 더 나이 먹은 애인이 말이다. 은백색의 희끗희끗한 머리에, 장애로 눈은 한쪽이 보이지 않는, 60대의 남자. 그는 나를 처음 만난 순간, 한눈에 나에게 빠져 버렸다고 한다. 통통한 얼굴과 체형을 좋아하던 그는 그러한 나의 모습에 반해 버려 나에게 열렬히 호감을 표현했다. 그때는 나도 그런 그가 싫지 않아 그와의 연애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성격이 불같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퉁명스러웠지만, 나에게만은 따뜻하고 상냥했던 그. 노래를 좋아해서 함께 노래방에 가서 성인 가요를 즐겨 부르던 그. 경상도 남자라서 감정 표현이 서툴기는 했지만, 항상 나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해줬던 그.
그렇게 나에게 잘해줬던 그였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를 철저히 이용했다. 선덕여왕의 미실이 그랬던가.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거라고. 그랬다.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빼앗았다. 그가 베풀어준 모든 것을 받기만 했을 뿐,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에게 일말의 마음 한 켠조차도. 그저 나는 그에게 적당히 잘해주고, 적당히 웃어주고, 적당히 함께 하는 척을 했을 뿐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웃어주면 그는 세상이라도 얻은 듯 크게 기뻐하며 나에게 더 잘해주고 더 큰 선물을 주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그의 마음을 이용해서 그에게서 내가 얻어내고자 하는 것을 얻어냈다.
그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때 나는 돌연 그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게 그를 자극하기 좋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결별 선언에 놀란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더 큰 것을 가지고 와서 나를 설득하고 애원했다.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설득에 넘어가 주기로 한다. 대신, 그가 가지고 온 선물을 받은 채 말이다. 이토록 이기적인 내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내 곁에 있으려 했고, 내가 힘들어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도와주려 발 벗고 나섰다. 이제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을 텐데, 그는 끝없이 나에 대해 기대하고 나를 갈망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내가 밑 빠진 독의 물 붓는 것과 같은데, 그가 보기에는 풍요로운 화수분으로 보였나 보다. 사람을 잘못 보는 것도 정도가 있을 텐데, 그는 어떻게 이리 사람을 잘못 보고 사랑을 하고 있는가.
나는 그게 의문이었다. 사랑을 하면 다들 그렇게 콩깍지가 씌는 것인가. 내가 사랑을 한 번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내가 태생적으로 이기적으로 태어나서 그런 것인가. 그도 아니면 세상과 주변에 대한 감사함을 체득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사랑의 원동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나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에 대해서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토록 무심할 수가 있을까. 에로스가 그에게는 사랑의 화살을, 나에게는 납의 화살을 꽂아 넣은 것이 아니라면 이 일은 도대체 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그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든다. 힘들어하는 그를 보면 마음도 편하지 않다. 그래도 내 안의 양심은 살아 있나 보다. 그러나 그를 사랑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의 사랑을 받아주지 말아야 했던 것일까. 그랬어야 했나 보다. 그의 마음을 받아줬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일 것이다. 그도 결과적으로 불행해지고, 나도 악순환의 고리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래서 그에게 이별을 요청한다. 당장 나를 잊지 못하는 마음에 힘들어하겠지만, 멀리 보면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하지 않아도 되니, 훨씬 잘 된 일이라고 여길 수 있을 테니까. 당장 나를 못 보고, 못 만지고, 못 안는다 해도 나중에는 저런 이기적인 종자와는 이별하길 잘했다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떠나려 한다. 하루라도 빨리 그에게서 떠나 주는 게 내가 할 일이다. 그게 내가 그를 이용하지 않는 길이요, 미안함과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