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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Dec 09. 2021

태양의 오케스트라

지구온난화에 대하여

태양이 밤의 문을 열고 중앙 무대로 당당히 입장한다
관객들은 본체만체 태양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저마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뉴스를 보거나 카톡을 할 뿐이다
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개들도 있고 M자 이마가 다 까지도록 부채질을 해대는 원숭이도 있다
 
단원들은 태양이 왔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딴청만 피우고 있다
배불뚝이 악장은 전날 먹은 술이 깨지 않아 끅끅거리고
임산부는 자기 배 만한 콘트라베이스 자리를 잡지 못해 헤매고
쌍둥이 꼬마들은 비터를 던지면서 곡예 놀이를 하고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덜덜 떨면서 오보에를 쥐고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태양은 최고의 연주를 보여주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허공을 향해 매끄럽게 지휘봉을 휙 휘두른다
지휘봉을 위아래로 내려 긋자, 그와 동시에
임산부의 하체에서 검붉은 피와 함께 아기가 쑥 하고 빠져나온다, 그와 동시에
할머니가 쥔 오보에가 힘없이 떨어지고 할머니도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와 동시에
쌍둥이 꼬마들이 던지고 놀던 비터로 자기 팔을 긁어댄다
 
태양은 혼란에 빠진다 어떻게 된 걸까
뒤편에 앉아 있는 관객들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땀이 얼굴에 송골송골 맺히고 팔 동작이 점점 빨라진다
 
태양의 손놀림이 정신없이 곡선을 그릴 때
트럼펫이 끓는 주전자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고
플루트가 유리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
악기들이 깨지고 부서지고 망가지고 달아오르고 끓고 녹아내린다
 
그렇지만 태양은 스스로 지휘를 멈출 수 없다

보다 못한 배불뚝이 악장이 술에 취한 목소리로,
썩 꺼져!
한 마디 호령하자 태양이 무대 밖으로 줄행랑을 친다
 
그 순간 무대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한 번에 멈춰 버린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배불뚝이 악장도
막 출산을 하고 숨을 돌리던 임산부도
바닥에서 곧 넘어갈 숨을 부여잡던 할머니도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던 쌍둥이들도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이제 일제히 멈춰버린 무대를 바라본다
조용히 응시한다 푸르게 얼어붙은 저 지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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