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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Apr 14. 2022

Hello again, My ex-love

연인에서 친구로 또다시

  작년 12월, 나는 그와 헤어졌다. 그와 나의 이별 사유는 나의 바람이었다. 애인을 두고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가졌다. 이것은 엄연히 100% 나의 잘못이었고, 나는 아무리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애인에게 욕을 먹고, 친구들에게 욕을 먹고, 이어서 가족들에게까지도 욕을 먹었고, 결국 애인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나는 애인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애인의 뚱뚱한 몸을 사랑하지 않은 것뿐. 애인과의 연애는 그런 생각에서부터 어긋났다고 생각한다. 몸매는 뚱뚱했지만, 애인은 무엇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내게 헌신적이었고, 그런 애인에게 있어 나는 첫 연애 상대였다. 그는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에게 푹 빠져 있었고, 나는 그런 그가 해주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가 해주는 요리도, 그가 내주는 술값도 내가 조금만 칭얼거리며 부탁하면 그는 모두 들어주었다. 마치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처럼. 


  그때부터 나는 안주하기 시작했다. 사랑을 받는다는, 그 고귀하고도 소중한 고마움을 망각했다. 나는 그가 내 요청을 따라주지 않으면 떼를 쓰고 성질을 부렸고, 그는 철없고 버릇없는 내 태도를 처음에는 눈감아 주다가 점점 지쳐갔는지 나중에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점 갈등이 심해졌고 치고받고 싸우기까지 했다. 싸우고 나면 우리는 서로 생채기를 낸 채로 아파해야 했다. 한 번은 애인이 발갛게 부어오른 얼굴을 동영상 촬영해 보낸 적이 있었다. 지금 너무나 아프다고 하는 그의 얼굴을 동영상으로 보면서 나는 내가 그에게 심하게 행동했던 것이 미안하고, 그가 안쓰러워서 눈물이 났다. 나는 그에게 화해를 하고 우리는 종전처럼 다시 연인으로 지냈다. 


  그렇다고 내가 완전히 그를 이용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지방 출신이었던 그가 서울에 연고가 없어 힘들어할 때, 고향에 있는 가족과의 갈등으로 괴로워할 때, 우연한 사고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을 때 나는 그의 곁에서 그를 위로하기도 하고 그와 함께 해결책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안고 싶어 했다. 그는 나와 잠자리를 가지고 싶어 했다. 나는 그의 모든 부분이 좋았지만, 그의 처진 허릿살과 엉덩이를 보면 관계를 가지래야 가질 수가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근육을 사랑했다. 남자의 성난 근육. 넓은 어깨와 탄탄한 복근, 그리고 두툼한 허벅지가 좋았다. 거기다 적당히 큰 성기까지. 그런 것들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나는 성욕이 생기질 않았다. 나는 그에게 이런 내 기질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서러워만 할 뿐이었다. 


  4년 동안 그와 사귀면서 그와의 관계를 계속 피해왔다. 애초에 내가 포지션이 탑이 아니었기도 했지만, 애인의 헤비한 몸을 안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가끔, 가뭄에 콩 나듯이 아주 가끔 그와 관계를 가졌지만, 나는 별로 흥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금단의 선을 넘어 버렸다. 어플에는 다양한 남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중 몇몇과 대화를 하다가 약속을 잡고 만났다. 외모도 준수하고 몸매도 나름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과 관계를 가졌다. 관계를 가질수록 나는 그 관계를 즐기게 되었고, 어느 순간 좀처럼 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하루는 섹스 파트너와 잠자리를 가지고 있을 때, 애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애인의 전화는 끊이지 않고 계속 왔고, 나는 그것을 애써 무시해 보려 했지만 결국 그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어디냐는 애인의 물음에 친구와 있다고 대답했지만, 그는 지금 당장 보자고 했다. 나는 젖은 머리를 말릴 사이도 없이 그에게 갔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바람을 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무슨 향수 냄새야?"

  "무슨 냄새?"

  "다른 사람 향수 냄새인데. 머리는 또 왜 이렇게 젖었어?" 


  꼬치꼬치 캐묻는 그에게 결국 나는 이실직고했다. 바람을 피워 왔었다고.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당분간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나를 놓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비록 내가 바람을 피워서 미워도 그동안 우리가 겪은 추억과 경험은 뛰어넘지 못할 것이라고. 


  그는 "이번만이 아니라는 것 알아. 전에도 바람 많이 피우고 나에게 숨겼던 거. 이제 질린다. 네가 멋대로 하는 것도. 모두 다!"라는 말을 남기고 내게 이별통보를 했다. 나는 한순간에 애인을 잃었다. 


  물론 내가 100% 잘못한 것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영원히 떠나보내지 않을 것 같던 당연한 존재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니, 내 앞조차 아득해 보이질 않았다. 그도, 나도 함께 우리의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었는데, 나의 잘못으로 모든 것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허탈했다. 조금만 더 애인을 안아줄 걸, 조금만 더 내 멋대로 굴지 말 걸 하는 후회가 파도치듯 밀려왔다. 


  며칠이 지났을까. 일주일쯤 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자는 연락이었다. 나는 한달음에 그를 만나러 나갔다. 카페 한쪽에 앉아 있던 그. 잘 지냈냐는 나의 말에, 대뜸 "바람피워서 죽여도 시원찮지만, 내가 어려울 때 네가 도와준 것도 적지 않으니까 친구로 지낼 수는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후회로 가득 찼던 일주일을 떠올렸다. 정말로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친구로 지내자는 말이 속죄의 기회를 준다는 말처럼, 우리 관계의 일말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와 친구로라도 남는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서울에 연고가 없는 그도 그동안 든든했던 내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애인 관계를 종료하고 친구 관계의 계약을 시작했다. 


  "마음대로 집에 찾아오지 않기. 내 허락을 받고 찾아올 것. 마음대로 밤에 불러내지 않기. 나도 내 사생활이 있어."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나에게 엄포 놓듯 얘기했지만, 나는 뭐라도 좋았다. 그가 나에게서 완전히 떠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마웠다. 이제 그에게 친구로서 잘하면 될 일이었다. 


  다시 만나줘서 고마워. Hello again, my ex-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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