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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Nov 01. 2020

너였구나

ⓒ 바람풀



숲을 걷는데 어디선가 달콤항 향이 번져왔다.

 '뭐지? 이 냄새는.'

킁킁대며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건 분명 솜사탕 냄새였다. 몽실한 솜사탕이 돌돌 소리 내며 부풀어 오를 때 나는 그 냄새! 바닥에서 잎 하나를 주워보니 아, 계수나무였다. 잎이 질 때 솜사탕 냄새가 난다는 나무.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토끼랑 같이 산다는 그 나무. 우리 마을에서 처음 발견한 나무다. 이웃에 오 남매를 둔 Y언니가 있다. 언니는 풀과 나무에 아는 게 많아서 함께 산책할 때면 주워듣는 얘기가 많다. 솜사탕 냄새가 나서 봤더니 계수나무가 있더라고. 지금도 그 나무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언니가 말한 곳에서 계수나무를 발견한 거다. 그때는 그냥 흘려 들었다. 이렇게나 달달한 냄새가 진하게 나다니. 고운 꽃수 놓아 치마 한 폭 지어 입고 싶은 동그란 잎새. 그 모양도 매력적인데 향기마저 감미롭다니. 빛깔에 홀린 시월의 숲에서 히죽히죽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한 황홀한 기쁨이었다.   




전에 살던 집 뒷마당에서 좀작살나무를 발견했다. 3년 반을 살았던 집이다. 마을 무인카페로 쓰고 있는 지금까지 7년 넘게 드나들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연보랏빛 열매.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야?

몇 주가 지난 다음에야 나무의 출처를 알게 되었다. 정원에 대해 얘기하던 중에 삽목이란 말에서 물꼬를 튼 기억이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오르게 한 것이다. 옆 마을 지인한테서 얻어온 가지 서너 개를 집 뒷마당에 꽂아 두고 제발 나무가 되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날마다 물을 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열매니까. 하지만 마른나무 꼬챙이인 채로 시간은 흘렀고 두 아이 키우느라 바쁜 나날 속에서 나무의 존재도 잊었다.

"너였구나! 그때 꽂아 둔 가지였어." 그걸 알아차린 순간, 마음이 보라보라 해졌다. 겉은 말라버린 나뭇가지처럼 보였지만 땅속에선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구나. 그걸 8년 만에야 알아봤구나.




"뭘 먹으면 그런 빛깔을 가질 수 있니?" 이슬 젖은 풀숲에서 파란빛이 반짝였다. 가까이 보니 새끼손톱 만한 벌레들이었다. 푸른 보석처럼 빛나는 단단한 껍질. 뭘 먹어서 저런 신비한 빛을 몸에 두르게 되었을까?

나무로 지은 우리 집은 곳곳에 틈이 많다. 나무로 지은 집이다 보니 건축에 쓰인 모든 목재가 수축 팽창을 거듭하며 마른땅이 쩍쩍 갈라지듯 터진 것이다. 산이 둥글게 집 주변을 감싸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 틈으로 숲 속의 벌레들이 자꾸만 들어온다. 봄이면 벌들이 날아와 윙윙대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창문을 열면 창턱에 벌 사체가 수북하다. 딱정벌레도 봄에 찾아오는 단골손님이다. 팔딱팔딱 귀뚜라미가 뛰어다니는가 하면 크기와 모양도 제각각인 거미와도 종종 마주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집 터줏대감은 그리마. 겨울이면 집게벌레가 출현한다. 수북이 쌓인 낙엽이나 퇴비, 나무껍질과 목재가 쌓인 곳에서 서식한다고 하니 이 모든 게 고루 갖춰진 우리 집 주변은 최적의 환경이다. 지난여름에는 머리 위에 뭔가가 꿈틀대는 느낌이 들어서 손으로 잡아보니 사마귀였다. 귀뚜라미나 꼽등이, 거미와 사마귀  같은 곤충은 손으로 잡아서 마당으로 돌려보내 준다. 로알드 달의 ‘제임스와 거대 복숭아’에서 제임스가 만난 할아버지를 나도 만날 수 있다면 난 곤충만큼 작아지는 초록 알갱이를 선물 받고 싶다. 벌레들의 비밀 통로를 파헤쳐 지도로 그려볼 수 있다면 좋겠다. 통로를 걷다가 새로운 벌레 친구를 만나면 또 다른 통로를 발견할 수 있겠지. 여기는 원래 산 밑의 덤불숲이었으니까. 우리 집이 그들의 서식지이자 거대한 통로였으니까.


이 세상에는 숨은 구멍들이 곳곳에 있다.
운 좋게 구멍을 발견할 수 있다면
신비한 우주의 비밀을 한 스푼 맛보게 되리라.

작고 여리고
소외되고 외면받은 것들에게 마음을 주는
당신에게만 보이는 구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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