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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섭 May 13. 2021

그래 우리답게 살자고




“시발! 돈이라도 많던가! 빽으로 어디 찔러넣어 주기라도 하던가!”

“지랄 좀 고마해라”     


 당시는 2020년이었다. 룸메이트인 친구 B가 신세계의 황정민이라도 빙의한 듯 거친 욕설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원망과 살기가 가득했다. 심지어 쌍욕을 하며 주먹으로 바닥을 내려치기도 한다. 옆에 있던 나는 ‘아랫집에서 층간소음으로 올라오지 않을까’ 걱정이 생길 정도였다.     


 그렇다고 친구를 더 말릴 수는 없었다. 왜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 슬프게도 B는 자신의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은 전부 부모 탓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저런 놈이 아니었는데, 친구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


  2년 전. B가 노량진으로 간다고 선언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나를 포함한 4명의 룸메이트들 또한 ‘저 근자감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라는 호기심이 생길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2년간의 공시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친구는 속에 분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세상을 원망하고 부모를 탓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유가 뭘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시생 생활을 하게 되어서일까? 하지만 그 당시에 그는 공무원 준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집안 경제 상황에 적신호가 켜지기 직전이었으니까.     


“나 휴학한다.”     


 그가 이 한마디를 남기고 노량진으로 가게 된 원인은 ‘돈’ 때문이다. 그의 집안 경제 상황에 빨간불이 들어올 날이 머지않았단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온전히 지원해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빠르게 공무원이 되어야만 하는 상황이란다. 물론, 대학교 졸업 후에 공무원 준비를 하려했던 친구는 당연히 반대했다. 하지만 부모에게 용돈을 타 쓰는 입장에서 반항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게 친구는 떠났다. 하지만 걱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제대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떠난 친구는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공부도 습관인데...     




 B가 떠난 후 몇 개월이 지난 후였을까? 당시 친구들과 PC방에 갔던 나는 익숙한 아이디를 발견했다. 바로 노량진으로 떠났던 B가 로그인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이디를 클릭하고 게임 기록을 봤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꽤 많은 게임을 했다고 뜬다.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마우스 스크롤을 아무리 내려도 그의 최근 플레이 기록은 끊이질 않았으니까.     


‘뭐하노? 공부 안 하나?’

‘몰라, 죽겠다.’     


 메세지를 보내자 친구가 답장을 했다. 힘들단다. 조그마한 고시원에서 쥐 죽은 듯이 지내야 하는 상황에 미치기 직전이란다.     


‘노량진 PC방에서 게임하냐...’

‘몇 달 있으면 부산 내려간다.’     


 친구 집안의 경제 상황에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나 보다. 그는 곧 본가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집에서 공부를 계속할 거란다.     


‘공무원 붙을 수 있긋나?’

‘당연하지 마음만 먹으면 다 하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친구. 그런데 친구의 게임 아이디에 기록된 최근 전적은 끊임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부산에 내려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2년이 지난 2020년. B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대학교에 복학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에게 공무원이 되길 강요하는 부모님과 다툰 후, 3학년으로 복학했다. 1년 동안 세계여행을 갔다 왔던 나는 졸업이 늦어졌기 때문에 4학년으로 재학중이었다. 그렇게 B와 같이 살게 된다.)     


“아, 좆같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네.”     


 그런데 오랜만에 본 친구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굉장히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밝고 당당했던 친구가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그런 녀석을 볼 때마다 걱정이 한가득이다. 젊은 놈이 아침마다 죽고 싶다는 말을 해대니... 항상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니 말이다.     


 2년 동안의 공시생 시절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시간만 흘렀기 때문일까? (당시 우리는 27살이었다.)     


“나이 먹고 돈 없는 건 죄야 죄!”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탓에 본가인 부산에서 공부를 했다던 B. 그는 자신이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이유가 노량진에서 계속 공부를 하지 못해서라고 말한다. 자신이 공무원 시험에 붙지 못한 이유는 부모가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해서라고 말한다.     


 그런 친구를 보고 있자면 할 말이 많으나 할 수가 없었다. 말만 그렇게 할 뿐, 자신이 왜 시험에서 떨어졌는지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무원 시험을 시작한다고 떠났던 날조차 PC방에 있었으니까. 노량진의 고시원에서 지낼 때도, 부산의 본가에 내려갔을 때도 펜이 아닌 마우스를 쥐고 있었으니까.


“아... 좆같다.”

“공무원 왜 할라고 하노. 힘들면 하지 마라 병신아”

“공무원 말고 답이 없다.”

“그게 왜 답이고?”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이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는 자신에게 공무원이 되라고 강요한 부모를 욕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공무원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한다.     


“뭐라도 해봐야 뭘 할 수 있는지 알지”

“모르긋다. 그냥 의욕이 안 생긴다.”     


 자취방에서 그와 같이 살던 약 1년 동안, 그는 항상 침대에 누워있었다. 항상 부모를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면서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공무원이 되겠다고 말한다.     




 그런 B를 보고 있자면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이 올라왔다. 하지만 더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그의 탓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왜냐고? 주변에 있는 장기 취준생과 장수 공시생들에게서 그와 비슷한 케이스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개인적인 문제도 당연히 있겠지. 그건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사회적인 문제도 섞여 있지 않냐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문제점을 100% 인지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난 그저 철없는 청년 중 하나일 뿐이다.)     


 고용불안이 만들어 낸 안전빵 올인 문화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철밥 그릇만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문화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는 청년들을 어리석은 사람 취급하는 문화라고 해야겠지.     


‘대체 왜? 왜 철밥 그릇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는 우리를 향해 혀를 차는 걸까? 우리는 다 다르잖아’     


 한때는 그런 시선을 향해 분노를 토하기도 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어른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굳이 분노를 토할 필요가 없어졌나 보다. 시대가 다시 변하고 있단다. 20대 공무원의 퇴사율이 늘어나고 노량진의 공시생 수가 급감한다는 기사가 수두룩하다.     


 친구 B도 결국에는 공시 공부를 그만뒀다. 울산에서 취직하여 일을 하고 있다. 오랜만에 내려가서 본 친구의 얼굴은 좋아 보였다. 심신이 안정되어 보였다. 돈도 나보다 훨씬 잘 번다.     


‘그래. 그거면 됐잖아 친구야. 그저 우리답게 살면 되지. 우리랑 맞지도 않는 공무원 옷을 굳이 입으려고 난리를 피울 필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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