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놈의 인생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그게 내 꿈이다
2014년 7월. 대학 생활의 첫 여름 방학이 시작된 때 나는 가출했다. 아니, 21살 다 큰 놈의 일탈을 가출이라고 부르기에는 이상하니 ‘일탈’이라고 정정하겠다. 하여튼 돈도 없는 대학교 1학년짜리가 홀로 집을 나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나왔냐고? 당연히 계기는 있다. 그 전날 어머니로부터 배부르게 욕을 먹었거든.
“네가 겨우 그딴 학교에 들어갔으니까. 이따구로 공부하는 거지! 내일부터 바로 재수학원 들어가!”
사랑하는 아들놈을 잡아먹을 듯이 쪼아대던 어머니.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내는 대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지방대를 다닌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더 큰 이유는 대학 생활 첫 학점이 고작 2.76이었기 때문이다.
성적발표날. 기대감 넘치는 눈빛으로 내게 학점을 물어볼 때까지는 모르셨겠지. 아니, 그 초롱초롱한 눈빛 때문에 더 큰 배신감을 느끼셨는지도 모른다. 말 잘 듣던 착한 아들놈의 첫 학점이 고작 2점이라니... 내가 큰놈이 되리라 생각했던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해본 전개였을 테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웃기긴 하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나는 맞을 짓을 해놓고서는 되려 성을 냈다. 다만 내 입장에서 변명을 해보자면 단순히 욕을 먹어서 가출한 게 아니었다. 집에 더 있었다가는 꼼짝없이 반수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왜 이딴 공부를 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수능 공부.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멍청했던 거겠지) 그 지옥 같은 수능 준비를 더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럼 싸우지 말고 부모님과 대화로 풀었어야지!”라고 내게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21년간 내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라는 피해의식에 빠져있었다. 내가 '검사'가 되길 원했던 어머니는 다른 진로를 말했던 나를 항상 “틀렸다”라고 말하셨거든.
물론,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느꼈던 아픔을 자식이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랬겠지. 하지만 어리석었던 당시의 나는 내 입장만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 때문에 내가 원하는 꿈이나 진로 따위는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는 원망을 했다.
“대화가 안 되면 대화로 할 필요 없다.”
그래서 나는 무식한 방법을 택했다. 대화를 시도하기 보다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집 창문에서 뛰어내렸다(주택이라 안 죽고 잘 뛰어내렸다). 그리고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꽁지가 빠지게 달렸다. 부모님께 잡히지 않고 고향을(경남 하동군) 뜨기 위해서는 최대한 달려야 했다. 이놈의 촌 동네는 교통편이 최악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으로 오는 시내버스가 하루에 2대 밖에 없었거든.
“엄마 나를 찾지 마. 나는 이제 혼자 살 거야. 이제 나 때문에 고생할 필요 없고 …”
심지어 오글거리는 문자까지 전송했으니 아주 완벽했다. 그런데 앞뒤 생각 없이 질러버린 탓일까? 막상 집을 나오니 뭘 해야 할지 몰라 허공에 붕 뜬 느낌이었다. 단순히 부모님에 대한 반발심이 전부였지 하고 싶은 꿈이 있어서 가출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잘 살다가 왜 갑자기 반발심을 느꼈냐고? 아마도 대학교에 입학하며 느낀 괴리감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호랑이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나는 토끼 한 마리에 불과한 것을 깨달았다.
죄다 9급 공무원을 꿈이라 말하는 학과 선배들. 그중에서도 합격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인원이 꽤 되었다. 그들과 나는 같은 선상에 있었다. 당연히 내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 꿈은 검사에요!”라고 외치던 어린이가 ‘내 주제에 검사는 무슨...’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 대학교 동기들 앞에서 “내 꿈은 검사에요!”라는 말을 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허탈했다. TV에 나오는 내 또래의 연예인들은 노래도 잘하고 돈도 잘 벌던데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어쭙잖게 공부만 했던 나는 특기도 취미도 없었다.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
역시 속담은 과학인가 보다. 나는 이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부모를 탓했으니까. 그 이유도 수십 가지였다. ‘이과에 가고 싶었던 나를 억지로 문과에 보냈던 어머니 때문에 나는 지금 꿈이 없어졌어’,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게 했던 어머니 때문에 나는 지금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됐어’, ‘내 인생을 본인의 뜻대로 주무르려 했던 어머니 때문에 나는 멍청한 놈이 됐어’, ‘나는 어머니의 아바타로 길들여졌어.’ ‘모든 건 내게 검사가 되길 강요한 어머니 탓이야’이런 류의 변명에 사로잡혀 나와 부모를 괴롭게 했다. 스스로가 못난 놈임을 세상천지에 증명하고 다녔다.
물론, 지금은 내가 왜 고작 저것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안다. 어쭙잖게 공부하는 척만 했던 내 과거가 원인이었다. 또한, 부모님이 내게 이런저런 강요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고 있다. 부모님은 이 세상이 적당히 살아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셨다. 자식놈이 좀 더 잘 살길 바랐고 자신들이 경험한 세상의 아픔을 겪지 않길 원했을 뿐이다. 단지, 부모님이 생각하는 최선의 행동을 택했을 뿐이다.
하여튼,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나는 집을 나왔고 친한 형님 집에 얹혀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학비나 벌기 시작했다. 노가다와 고깃집 알바를 병행하며 밤낮을 일했다. 하루에 3시간을 채 못 잔적도 많았다. 그런데 그 당시의 나는 그 순간이 ‘행복하다’라고 생각했다. 내가 내 손으로 내 삶을 일궈낸다는 느낌이 굉장히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한동안 꿈도 목적도 없이 자유의 맛에만 심취해 살았다. 이후 부모님과 연락이 닿아서, 나 때문에 “어머니의 심장이 나빠져 병원에 간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도 ‘나도 부모에게 휘둘리며 살 바에는 그냥 죽어버리겠다’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 더 할 말이 있었겠는가?
이런 말만 들으면 시간만 헛되이 보낸 헛짓거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기 계발은 못 할망정 부모 속만 썩이고 살았으니까. 나도 이때의 내가 부모 속만 썩이는 못된 후레자식이었던 것은 인정한다. 다만, 헛되이 시간만 날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에게 반항하던 이 시기에 내 꿈이 생겼다.
“여러분, 꿈은 직업이 아니에요. 직업은 꿈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에요. 그러니 공무원에 얽매이지 말고…”
폭풍 같은 여름 방학이 끝나고 시작된 2학기. 그때 들었던 전공과목의 OT시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교수님의 말씀이 내 후두부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꿈은 직업이 아니라는 말, 저 말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께 했던 말이었다.
“엄마, 꿈은 직업이 아닌 것 같아. 직업은 꿈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중 하나가 아닐까?”
“내가 그런 생각 하는 사람 한 명을 아는데, 지금 그 사람은 돈도 못 벌어서 밥도 제대로 못 빌어먹고 산다더라! 그런 틀린 생각 하면 안 돼!”
교수님이 OT시간에 하셨던 저 말씀은 2010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께 똑같이 했던 말이다. 그 당시 어머니는 내게 "틀렸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의 나는 어머니를 인생의 해답지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 말을 그대로 따랐다.
그 탓일까? 어느새 나는 자주 ‘틀린 사람’이 되곤 했다. 특히, 꿈과 진로에 관해서는 그 경향이 더 심했다. 과학자·개발자·강아지 사육사 등 하고 싶었던 것은 많았으나 시도조차 못했다. “그런 걸로 어떻게 밥 벌어 먹고살겠어! 검사가 돼야지!”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반박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밥도 못 벌어먹는 저 삶은 틀린 삶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저 교수님은 밥도 못 빌어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여, 국립대학교 정교수가 된 교수님. 여성 법학 단체의 협회장을 맡고 있을 정도의 엘리트다. 그런 사람이 꿈은 직업이 아니라고 말했다. 내가 틀렸다고 말씀하셨던 어머니와는 다르게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셨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꿈이 생겼다.
‘내 인생도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모든 삶에는 각자의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게 내 꿈이다.
꿈은 직업이 아니니까. 직업은 꿈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니까. 나는 이 가치를 믿고 싶다.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신 교수님처럼, 내가 내 말에 힘을 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