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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섭 Dec 05. 2021

그래서 어쩌라고 씨발

친구도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마! 핵수!”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홀쭉한 놈이 익숙한 소리를 내뱉으며 다가온다.     


“뭐고”

“금방 지하철역 안에서 닌 줄 알고 마! 마! 거리면서 두 번이나 말 걸었는데 모르는 사람이었어”     


 모지리처럼 모르는 사람한테 말을 걸었다는 친구. 그는 고등학교 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해있었다. 포동했던 볼살은 어디 갔는지 홀쭉해졌고 경상도 특유의 어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이 머라데?”

“아무 말도 안 하던데?”     


 역시 고향 친구라 이건가? 이제 사회인이 된 성인의 여유로움 때문일까? 우리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8년 만에 조우했지만 어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좀 과장을 보탠다면 어제까지 고등학교에 등교를 했던 느낌이랄까?     


“밥이나 무러가자”

“뭐 먹을래?”

“서울 사람이 안내 좀 해봐라”     


 당시는 2021년 12월. 나는 가을도 없는 삭막한 서울에 올라온 지 고작해야 3개월 차다. 그렇기에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쭉 서울에서 지냈던 친구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삼겹살 좋아하냐?”

“아, 좋지”     


 뭘 먹는 게 뭐가 중요하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게 중요하지. 그렇게 우리는 무한리필 삼겹살 집으로 가서 총 4판을 먹었다.     


“아 오늘은 참는다.”     


 친구가 4판을 먹고도 오늘은 참는 단다. 이렇게 대단한 놈인지는 오늘 처음 알았다. 아, 물론 나도 살짝 거들긴 했지만...     


“손님, 이제 2시간이 다 돼가서요.”

“아, 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우리는 할 말이 많았다. 무한리필 가게 이용 시간인 2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알바생의 경고를 들었을 정도였다.     


“카페나 가자”     


 살짝 민폐가 된 듯한 느낌을 떨치고 고깃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무 카페나 들어간 후 커피를 시켰다.     




“그래서 대학원 졸업하고 나면, 목사 되는 기가?”     


 커피를 받아오며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가 당연히 목사가 될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의 집안은 신실한 기독교 집안이고 그의 아버지는 목사시니까. 친구 또한 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원까지 갔으니 이 정도면 당연한 질문이라 생각했다.     


“아, 모르겠어.”     


 응? 이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일단 휴학하면서 생각해보려고 이게 나랑 맞는 길인지 모르겠어서. 그냥 부모님 말씀대로 살다가 지금까지 왔는데...”     


 목사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인해 자연스레 목자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28살인 지금에서야 자기가 걸어온 길이 아닌 또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다고 한다.     


“부모님은 머라시노?”

“아버지는 마음대로 하라는데 어머니가 좀 반대하시지. 하던 데로 하면 안정되게 살 수 있는데 왜 굳이 힘든 길로 가냐면서”     


 내가 그쪽 업계에 대해서 아는 건 1도 없지만, 친구 어머니의 말씀에 틀린 말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정확하게 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 건 또 아니야. 하하”     


 근데 왜일까? 어째서 나는 목적지 없이 다른 길로 새고 싶다는 친구를 오히려 더 응원하고 싶을까? 친구 어머니의 말씀이 백번 천번 들어도 합리적인데 말이다.     


“모르겠다. 대학원까지 왔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닌가 걸리기도 하고.”     


 뒤늦은 사춘기일까? 잠깐의 일탈일까? 정확한 심리는 친구 자신만이 알겠지.     


“늦은게 어딨노. 그냥 해라. 하고 싶으면 해야지 별수 있나”     


 가보지 못한 길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게 사람이라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시도한 이후에 닥친 후회와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중에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인 후회를 고를 테니까.     


“그래서 그냥 하려고. 하하”     




 부모의 뜻대로 살던 자식이 삶의 방향을 바꿀 때, 부모와의 마찰이 강할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탓일까? 나는 친구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리 격하게 반대하시지 않았나 보다. 친구도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는지 불명확한 뭔가를 하겠다고 선언했을 뿐이다.   

  

 다만, 걱정되는 한 가지는 있다. 쉽게 타인을 재단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좋은 재물이 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색하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뭐 할 건데?”

“나이가 좀 있는데, 늦은 거 아니냐?”     


 그들은 보통 이런 식의 공격을 행하며, 내 선택에 의심을 가지게 만든다. 당연히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되겠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국룰이지 않은가? 자꾸 두드리다 보면 단단한 바위에도 금이 갈 수밖에 없다.     


 또한 그들의 시선을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 마치 한심하고 철없는 뭔가를 봤다는 듯한 조롱 섞인 눈빛. 내 인생을 안주 삼아 왈가왈부하는 듯한 눈빛.


만약 그들의 눈에 입이 달렸다면 “으휴, 개노답 인생. 네 인생은 이미 망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거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공격과 시선을 받았을 때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한 척했다. 하지만 내면은 쿨하지 못했다. 공무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스펙 쌓기는 뒤로한 채 외국이나 돌아다니고 있을 때, 뒤에서 누가 나를 "개노답 인생으로 말했다더라" 같은 소리를 지속적으로 들었으니까.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누적된 데미지가 쌓였는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뒤에서 나를 욕하는 그들의 말대로, 그 당시의 나는 미래를 위한 생산적인 뭔가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명확한 사실은 내 머리에 온갖 잡생각을 만들었고 스스로의 선택에 의심을 불러왔다.




“그래서 어쩌라고 씨발”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쌍욕을 퍼부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식의 무논리를 외쳤다. 분노와 부정적인 감정을 담아서 오히려 나를 욕하는 그들을 욕했다. 한 마디로, 당시의 나는 무논리와 부정적인 감정을 자기방어 기재로 활용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이 무식한 방법이 효과가 있었다. 막무가내식의 외침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잠재웠고 내가 내 선택대로 살 수 있게 해줬으니까. 굉장히 비상식적이고 부정적이며 오히려 스스로에게 해가 될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다.     


 당연히 현재도 이 방법을 종종 쓴다. 누군가 내 인생에 대해 왈가왈부하려 하거나, 내 선택을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취급을 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속으로 항상 외친다.     


‘그래서 어쩌라고 씨발!’     


 이게 올바르지 못한 깨달음일까? 무식한 내 성향 탓일까? 이런저런 잡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택한 삶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나는 그거 하나면 충분하니까.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도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본인의 선택을 방해하는 여러 장애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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