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델란드에서의 둘째 날 (2016년 6월 26일)
잔제스칸스는 풍차마을로 유명하다. 네델란드의 상징인 풍차는 네델란드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 되었다. 잔제스칸스는 풍차 민속마을이나 보존구역과 같은 곳이었다. 기차를 타고 꾸지잔디크란 역에서 내렸다. 기차에서 내려 풍차마을까지 걸었다. 바람에서 초가을 냄새가 났고 햇볕은 설익은 봄 같았다.
바람 따라 여린 풀들이 강물 위의 잔물결에 손을 흔들었다. 풍차는 큼직한 바람개비를 돌려 환호했고 강물은 화답하듯 일렁였다. 가장 멀리 보이는 풍차까지 시선이 다다랐다. 가버린 시선은 돌아올 줄을 모르고 허공에 잠시 머물다 눈을 감았다. 한동안 벤치에 앉아 꼬은 다리의 무릎만 만지작거렸다. 이 아름다운 나라가 더 보고 싶어 졌다. 좀 늦긴 했지만 크뢸러묄러 미술관이 있는 호헤 벨루에 국립공원으로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과 ‘밤의 카페테라스’ 등 87점의 고흐 그림이 있는 곳이었다. 아른햄으로 가는 인터시티 기차를 탔다. '오늘의 앞일이 어떻게 지날 것인가?' 알 수 없을 때는 무작정 기차에 올라타면 된다. 그 기차가 나를 낯선 장소로 보내고 현실에 맞서도록 뒤에서 밀 것이다.
아른햄에 도착해 버스 플랫폼 K에서 오델로로 가는 105번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 플랫폼은 버스의 도착 예정 시간을 정확히 보여주었다. 유럽 국가 중 네델란드의 교통이 가장 편하게 느껴졌다. 105번 버스를 타고 오델 센트룸에서 106번 버스로 다시 갈아타면 되었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네델란드의 시골 풍경 속에 빠져 들었다. 그만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버렸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건너편으로 가서 다시 타려고 했다. 그런데, 참 묘한 상황이 발생했다. 흑인 버스기사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내리려고 하니 걸걸한 목소리로 “stay here”하고 못 내리게 했다. 그리고, 버스는 하염없이 시골길을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 안에 더 이상 안달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그렇게 버스는 한 시간 이상을 달렸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 버스가 다시 돌아오는 버스였다. 그러니 건너편에서 기다려 봐야 히치하이킹을 하지 않는 이상 내가 탄 버스를 다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길은 인적 없는 시골이어서 달리 쉴 곳도 없고 한적했기에 버스기사가 낯선 여행객의 안전을 걱정한 것이었다. 그 흑인 버스기사는 다음 교대 기사에게 내가 내려야 할 정거장을 알려주고 버스 요금도 받지 않았다.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덕분에 네델란드 시골길 버스투어를 신나게 한 셈이었다.
호헤 벨루에 국립공원에는 오후 5시가 되어서 도착했다. 국립공원 안으로 버스가 지나다녔다. 착하게 생긴 버스기사가 나쁜 소식을 전했다. 크뢸러뮐러 미술관은 오후 5시면 문을 닫는다고 했다. 도착한 시간이 5시이니 이미 늦었다. 국립공원은 넓은 초원과 산림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공원 입구에 자전거가 비치되어 있어 자전거를 타고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웃음만 나왔다. 드넓은 공원을 수백 년 지켜온 나무들이 이방인을 맞이했고 두 줄로 늘어선 나무들 사이를 바람이 스치듯 지났다. 끝이 어딘지 모르게 이어진 길을 어디에서 멈출지도 모르게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한 참을 내달리니 피크닉 센터라는 곳이 나왔다. 방금 전에 장이 섰던 모양이었다. 더 앞으로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아쉬울 뿐이었다.
자전거를 다시 돌려 크뢸러뮐러 미술관으로 향했다. 문이 잠긴 미술관 입구에 조각상 하나가 아쉬워하는 나를 묵묵히 맞아 주었다. 오스발트 베켄바흐의 조각 작품이란다. 다시 이곳에 와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겼다. 미술관을 나와 나무 사이를 자전거로 지나며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지난 23일의 유럽여행이 머릿속에서 필름 돌아가듯 빠르게 돌아갔다.
내일은 한국으로 돌아간다. 이제 여행을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 퇴직하고 나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여행을 계획했었다. 여행을 떠나올 때는 가방에 근심만 한가득 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가방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가방을 열어 보았다. 지나간 버스에 안달하지 않고 문 닫은 미술관이 남겨놓은 여운을 즐기고 앉아있는 내가 있었다. 이제 네델란드의 낯선 시골마을에서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린다. 기다리면 버스는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