쇤브룬궁전 앞에 도착했다. 쇤브룬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궁전이었고 '아름다운 샘'이라는 뜻이다. 나에게는 '빈 필하모닉'의 여름 공연 장소로 친숙하게 기억되는 곳이었다. 그 공연의 배경이었던 잔디언덕과 구릉 위에 세워진 글로리에테('영화의 탑')가 저 멀리 아득히 보였다. 보고서는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 낮 더위에 입구에서 잔디언덕까지 오르는 발걸음이 이 드넓은 정원에 부스러기 같은 그늘만을 찾았다.
쇤브룬 궁전은 비운의 황후 '시시'의 이야기로 유명하다. 시시가 죽었을 때 무심했던 그녀의 남편 요제프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하며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다. 쇤브룬 앞 궁전을 홍보하는 입간판에 적혀있는 글이었다. 잔디언덕을 오르면서 그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살아 있을 때는 얼마나 사랑하는지 마음껏 표현하는 거다. 죽은 후에는 얼마나 사랑했는지 가슴으로 말하는 거다. 사랑은 가슴속에 묻어두는 것이 아니고 가슴속을 열어 보여주는 것이다. ' 잘 알지도 못하는 요제프 황제가 답답해 보였다. 이 더위에 시시가 머물렀던 이 궁전을 걷노라니 누구라도 시비를 붙고 싶은데 요제프 황제에게 죄의식 없는 짜증을 쏟아부었다. 어느새 잔디언덕에 올랐다. 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이제 내려가 여행가방을 챙겨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예정대로라면 어제 오스트리아 빈에서 체코로 떠났어야 했다. 체코로 가는 기차를 타지 않았다. 대신 어제 오스트리아 빈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네덜란드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오스트리아 빈공항을 출발해 오후 5시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옆 호텔에 짐을 풀고 암스테르담 중앙역으로 가는 전철을 탔다. 해가 벌써 저물어 가고 있었다.
중앙역에서 담락 광장까지의 담락 거리는 각국의 여행자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거리에서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감자칩을 들고 서서 먹고 있었다. 이곳 감자튀김이 명물이라고 소개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왜 명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방인들로 뒤덮인 거리에 오히려 이방인들이 제 집 안방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그 옛날 스페인 펠리페 2세의 탄압으로부터 떠나온 신교도에게 이 나라가 관대했듯이 이방인들을 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합리적인 사고와 개방과 존중이 이 나라가 세계 대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오늘 떠나온 오스트리아는 전통과 품위 이면에 완고한 고집이 느껴졌었다. 네델란드는 개방과 자유가 거리에 쓰여있었다. 어느 골목에서 바람 따라 비릿한 꽃향이 거리를 지나고 갔다. 검색해 보니 마리화나 냄새였다. 오스트리아에서 교양 있게 지내다 왔는데 암스테르담은 그야말로 날것이었다. 그럼에도 담락 거리는 그냥 꽃향기에 취해 들뜬 사람들이 가볍게 흐느적거릴 뿐 광란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녁 10시 암스테르담의 수로를 따라 돌아보는 마지막 유람선을 탔다. 수로를 따라 바다로 나오니 네델란드 과학박물관인 '니모(NEMO)'가 당장이라도 출항할 기세였다. 해안을 따라 펼쳐진 웅장한 대양을 누비다가 다시 좁은 수로로 들어서면 분위기는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었다. 좁고 길쭉한 창문과 건물들로 미니어처 세상에 들어온 듯 했다. 창문의 크기로 세금을 매기다 보니 지금의 좁고 긴 창문이 만들어졌다. 제도가 지금의 암스테르담 건축양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수로를 따라 수없이 드나드는 배들로 인해 물 위에 잔물결이 그치지 않았다. 불빛들이 수로 위로 번져 흐르고 고즈넉함이 그위에서 살랑거렸다. 지금부터는 여행자만이 어둠이 내린 수로를 따라 고즈넉함을 헤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