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마을?
결혼할 때 남편의 직업은 군인이었다.
고향을 떠나 신혼살림을 계룡시에 있는 관사에서 시작했는데, 큰 아이를 낳고 돌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무작정 아이를 들춰 업고, 근처 빵가게에 가서 빵을 산 후, 1층 집 벨을 눌렀다. (작은 아파트라 누가 이사 오고, 아이가 있고 없고 금방 알 수 있다.) 가벼운 인사만 주고받았던 터라, 갑작스러운 방문이 불편했을 텐데도 그녀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집을 떠나 타 지역에서 산다는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서 그녀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밥도 같이 해 먹고, 아이도 같이 돌보며, 20년이 지난 지금도 속마음을 나누는 친구로 지내고 있다.
관사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관계가 형성되었다. 서로 돌보아 주는 관계.
비슷한 상황,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하나 둘 친해지고, 급한 일이 있으면 아이도 봐주고, 음식도 넉넉히 해서 나눠먹고, 물건도 나누고, 힘들 때 서로를 보듬어 주는 관계였다.
큰 아이가 돌이 지나고, 서울에 있는 관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그런 관계는 지속되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 아이를 보낸 후 엄마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반찬을 나누어 먹고, 서로 필요한 물건을 바꾸기도 나누기도 하고, 바쁜 일이 있으면 서로 아이를 돌봐주고, 서로의 집을 편하게 드나들며 놀게 하고, 밥때가 되면 밥을 먹여서 보내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8> 같은 날들이었다. 지금 스무 살이 된 큰 아이는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관사에서 나와서 살게 되면서 그런 관계는 더 이상 힘들어졌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지금.
나는 우이동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재미난 마을의 공동체 일원이 되었다.
처음 마을 장터방에 초대되었을 때, 장터방이라고 해서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인 줄 알았다.
그곳에서는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물건을 나누고, 반찬을 나누고, 물건을 팔기도 하는, 직접 만나지 않아도 곁에 있는 듯한 시끌벅적한 곳이었다. 이 익숙한 느낌은 뭐지? 그곳이 궁금한 나는 우엉볶음과 당근라페를 넉넉히 만들어 나눔을 한다고 글을 올렸다.
금세 나눔이 끝나고, 나눔 한 반찬을 재미난 카페 냉장고에 넣어 두면, 자기가 편한 시간에 찾아간다. 그런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마음속 한 켠이 몽글몽글해졌다. 관사에서 지내 온 시간들이, 힘들었지만 행복하고 즐거웠던 그 시간들이 생각나고, 잊고 지내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전에 살았던 관사의 경우, 집마다 수저가 몇 개인지 알 정도였다. 서로가 관심이 있고, 주기적인 교류로 인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는 몇 안 되는 부모들이 모인 곳이라 그런지 서로가 고민하는 것도 비슷하고, 교육관도 비슷하고, 주기적인 교류가 있어서 신뢰관계 형성이 빨랐다.
얼마 전, 큰 아이와 공부 문제로 갈등하다가 부모가 아닌 다른 어른과 이야기를 나누면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학부모인 치타에게 상담을 부탁했다.
늦은 시간 치타와 상담을 한 아이는, 치타의 전화번호까지 받고, 함께 이야기하고, 공감을 해주니,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며 고마워했다.
재미난 학교가 올 해로 20주년을 맞이한다고 한다. 2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우리가 올 수 있게 그 자리에 있어준 재미난 학교와 재미난 마을에 감사한다.
글을 쓰는 지금 장터방에 올라온 ‘수제 토마토소스&오이피클’ 주문에 성공했다. 이얏호!
매번 늦게 확인하는 바람에 놓쳤던 해미르의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내일은 또 어떤 게 올라올까? 장터방에 글이 올라올 때마다 점점 빨리 확인하게 된다.
재미난 마을, 딱 내 스타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