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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준 Jun 03. 2024

40대는 지킬 것이 너무 많아서.

때로는 비겁해지기도 하고, 그릇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던 때는 나만 잘하면 되었어요. 내 한몫을 하고 나를 위한 선택을 하고, 때로 적당한 휴식과 일탈도 즐기며 살았습니다. 모든 선택의 준과 목적은 나의 행복에 가까운 선택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당연하고, 올바른 선택이었어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를 성장시켰고, 많은 배움과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도전에 두근거렸고, 불의에 저항했습니다. 옳은 일을 하는 것에 가슴속은 뿌듯했고, 불합리한 일과,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생기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은요. 아주 조금은 비겁해졌어요. 옳은 일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가슴속에 뿌듯함이 남아 있어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차가 없는 횡단보도를 무단으로 건너지 않으며,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소한 도움을 주는 일에 여전히 즐거워합니다. 하고 나면 스스로가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은 20대의 그 때나 지금도 같아요. 하고 나면 스스로 대견스럽거든요. 그런데 지금인요 조금은 더 불의에 대해 관대해졌어요. 아니 일부러 눈을 돌리게 되네요. 그러고 나면 따라오는 부끄러움과 후회인 것도 아는데. 저는 자꾸만 불의에 대해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20대 때는요. 길거리나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에게 곧잘 훈계도 했어요. 길거리에서 너무 시끄럽게 욕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조심스레 자제해 줄 것을 부탁드리기도 했지요. 뭐.. 때때로 흥분해 달려드는 사람 때문에 저도 같은 욕설을 나눈 적도 있네요. 거리에 던지는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려줄 것도 몇 번이나 말을 했는지 몰라요. 대부분은 멋쩍게 들어주십니다. 때로는 제가 먼저 주우며 부탁하니, 웬만하면 주워 갑니다. 다른 곳 어딘가에 버릴지는 몰라도요. 뭐 그때는 별로 겁도 없었어요. 싸움은 못해도 도망을 잘 친다 자부했기에 맞서 싸울 생각은 없고, 여차하면 도망가야 지란 생각만 했으니까요. 



지금은요. 어딜 가도 아이의 손을 꼬옥 잡고 다닙니다. 큰 딸이야 이제 나이가 들었다고 손을 잡아주지도 않지만, 둘째와 막내는 사람 많은 곳에서는 꼭 손을 잡습니다. 사람 많은 곳에서 혹여나 다칠까 봐, 잃어버릴까 봐 손이라도 잡고 있어야 안심이 되네요. 어딜 가도 아이들과 함께 있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니다 보니, 20대 때의 그와 같은 일을 마주치면 이제는 못 그래요. 담배를 피우는 학생을 보면 슬그머니 다른 길로 돌아가고, 욕을 하는 학생들이 앞에 보이면 천천히 걸음을 늦추고, 꽁초를 버리는 아저씨의 모습을 못 본 척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겁이 나거든요. 혹시 이 아이들을 지킬 수 없을까 봐. 혹여나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내가 이 아이들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올까 봐 무섭습니다. 아이를 구하고, 내가 다치는 것도 안돼요. 아이에게 짐이 될 수 없고, 아직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아주 많아요. 그런 불행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딱 한 번의 실수와 잘못된 판단으로 아이들이 상처를 받는다면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서 되도록 피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았어도, 그 일이 보일만한 낌새만 느껴도, 냄새만 맡아도 아기오리를 꼬리에 달고 다니는 오리 아빠처럼 안전한 곳, 좋은 것만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합니다. 


때로는 부끄러워요.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 말하지 못하고,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는 저런 행동은 나쁜 짓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부끄러워요. 아이들을 너무 온실 속에서 무균의 환경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 과연 아이를 위한 길일까? 고민도 됩니다. 적당한 고난과, 고통 그리고 실패를 겪어야 조금 든든한 뿌리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합니다. 


어쩌면 과잉보호가 맞을지도 몰라요. 조금 더 거친 길을 가더라도 혼자 걷게 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아무리 머리로는 알아도, 태어날 때 안았던 그 꼬물이가, 아장아장 걷던 그 꼬맹이가, 언제나 엄마 아빠만 부르던 그 어린이가 자꾸 겹쳐만 보여요. 어떤 길도 꽃길만 걷게 하고픈게 부모 맘인지..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돌아볼 때면, 제 자식만 알고 행동하는 이기적인 부모는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이기적인 부모가 되었나 봐요.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비겁함을 택했다 말하지만, 정말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면 더 많은 행동을 해야 하는 게 맞는 거예요. 그렇게 배워왔고, 20대의 나는 그렇게 행동했어요. 나만을 위한 행동이 아닌 사회를 위한 행동이라 생각해, 학생들의 일탈을 제지하고, 공중도덕을 지켜보자 부탁을 하고, 옳은 일을 하자 다짐을 했습니다. 


40이 넘어서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때라 하는데
저는 더 흔들립니다. 


지켜야 하기에, 지켜야 하기에 불의를 자꾸 외면하면서 혼자 부끄러워합니다. 아이에게 가장 안전한 곳을 보여주고 싶다며 하는 제 모습들이, 제 한 아이만을 위한 행동이라 생각되어 부끄럽습니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함인데 뭐'라고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그 행동이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흔들림은 부끄럽지만 견딜만합니다. 제가 가장 두려운 것은,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 여겼던 그 순간들이 그저 제 아이만을 옳게 키우고 싶어 하는 한 아비의 욕심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제 아이만을 보는 욕심에 정작 아이에게 필요한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눈 감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렵습니다. 


부디 내 아이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무탈하게,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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