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이부터 중년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대략 사회적인 합의로 보아서는 마흔이 넘어서는 기혼자의 경우 보통 중년이라 칭하기 무리 없는 듯하다. 아쉬운 것일지 다행인 것일지 모르지만 미혼의 경우 좀 더 늦게 중년에 합류하게 되는 것도 같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 중년이거나 혹은 중년이 아니라 이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시길..
내가 생각하는 중년은 피지컬의 문제라기보다, 판단의 기준으로 좌우되는 것 같다. 좀 더 중년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위해서는 중년이 되기 전의 청년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할지 모른다. 청년이라 함은 어떤 이미지일까? 각자 청년을 정의하거나 바라보는 기준, 기대치가 다양할 것이다. 보통 청년이라 함의 사회적인 기준은 이렇다. 대략 34세 정도까지의 연령에 성인으로서의 법적 책임을 지기 시작하지만 아직 안정된 경제력이나, 사회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 시기의 인간. 심리적으로는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하며,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설정해 나가는 시기를 청년기라 칭할 수 있겠다.
청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 마지막 부분이라 생각한다. 스스로의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며,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설정해 나가는 시기의 인간. 청년기에는 스스로가 가장 큰 목표가 된다. 모든 행동과 계획의 기준은 스스로의 자아 성장과 계발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가장 도전적이며, 가장 활동적인 시기이다. 행동과 판단의 기준이 자아에 집중되어 명확하고, 속도가 빠르며, 때로는 다른 것을 고려치 않을 정도로 파고들기까지 한다. 이것이 청년기의 장점이자 특혜가 되기도 한다.
이 시기를 지나면 중년으로 접어들게 된다. 보통 중년기를 접어들게 되는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청년기에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을 가지게 된 것이 이유가 되기도 한다. 보통 청년기에는 가진 것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판단의 변수가 적다. 청년기를 지나 중년기에 접어들 무렵이 되면, 대다수의 경우 사회적 기반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고, 가정을 이룩한 경우가 많다. 더 많은 변수들이 생겨난 것이다. 청년기에 가지지 못했던, 사회적 기반과 가족들이 판단의 변수가 된 셈이다. 소위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긴 셈이다. 잃어도 그만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생긴 것이다.
중년의 인간에게 가족이란 살아가는 목표나 지향점 같은 역할이 된다. 그들을 부양하고 지키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 들이 있기에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족은 어떻게든 지키고 보호해야 할 최후의 내 것이다. 내가 먹지 못하고, 내가 제대로 쉬지 못해도 아이들의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기 위해 오늘 하루를 버티는 이유가 된다.
쉽지 않다. 청년의 개인적인 삶을 살아왔던 이들에게 갑자기 본인이 아닌 가족과 아이들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직업이 아니다. 싫다고 퇴사할 수 없을 뿐더러 지울 수 도 없는 일이다. 한 번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남녀 간의 인연이야 맺고 끊음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부모 자식의 관계는 다르다. 싫다고 돌아설 수도, 포기할 수도, 인연을 끊어 낼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은 그런 사람들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금수만도 못하다 칭하기도 한다. 법으로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처벌을 내리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처벌과 강요가 없어도 가족을 그런 각오를 가지고 만든다.
무엇이 되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존재.
내 선택 기준에 있어 무엇보다 먼저 고려되어야 할 대상.
중년이 된다는 것은 이런 판단의 기준이 명확하게 자리 잡은 상태로 접어든 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나의 행동 규범이 어느 정도 틀 안에 자리 잡은 상태로 다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년의 행동은 쉽게 예측이 가능해진다. 중년의 인간이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말하는 것은 어려운 수수께끼가 아니다. 중년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가족이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금전적인 부를 쌓는 것 자체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족에게 좋은 것들을 제공해 주기 위함이 우선이다. 본인의 부와 명예를 위함이 아니다. 본인만을 위해서라면 대한민국의 과로사는 현저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최우선의 목표와 동기는 가족이 된다.
중년의 명확한 목표는 때로 인간을 덜 재미있게 만든다. 행동 예측이 가능하며, 위험도가 높은 일에 대해 보수적으로 판단하게 되기에 때때로 삶이 단조롭거나, 무미건조해 보이기도 한다. 개개인의 삶을 보면 무미건조한 삶일지 몰라도, 가족이라는 변수를 적용하면 안전하고, 안정된 삶이라 부르게 된다.
하지만 세상일이 모두 뜻대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대부분의 가족들은 그런 희생을 매일매일 인식하면서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부모 세대들의 희생과 고생에 대해서 매일 감사하며 살지 않았듯. 지금 우리의 자녀들도 그들이 지니고 누리는 것들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누리던 것이며, 처음부터 있었던 것들에 가깝다. 그 뒤에 감추어진 중년인들의 노고와 희생, 자존감의 대가로 얻어진 것들임을 매번 인식하지 못한다.
유년기야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으며, 청소년기와 사춘기를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부모의 그런 희생을 알아달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보통 그런 고마움은 그들 역시 부모가 되어 본인들의 가정을 꾸려나갈 때 깨닫게 된다. 지금 중년인 내가 이제야 나의 부모의 희생에 감동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그들의 가정을 꾸리는 때가 되어서야 그나마 '우리 부모도 힘이 들었겠구나'라고 상상해 볼 여지가 되어 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 아마 내 자식들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참 부끄럽고, 아쉽지만, 그런 생각이 드니까 조금 외롭다고 느껴진다. 청년기의 나는 참 반짝거렸는데. 참 활동적이고 빛이 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예뻤던 모습들은 지나가고, 낡고 늙은 중고의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외롭게 한다. 왠지 이제는 쓸모를 다한 듯 가치 없는 인간이 되어가는 듯도 싶다.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가정주부의 역할은 아마도 이런 상실감이 더 클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는 흥망성쇠가 있고, 모든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경제 사이클도 성장과 쇠퇴기가 있는 것처럼 나의 삶도 마냥 우상향의 그래프로 살아갈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제 서서히 쇠의 이야기를, 결말의 이야기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올지 모른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써 내려갈 때가 되었다는 것은 내가 나의 자식들이 어느 정도 스스로의 판단을 가지고 생활할 청년기에 접어들게 되었다는 뜻일지 모른다. 이제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들 스스로 자아에 대해 집중하고 성장하기 위해 스스로 애쓰는 어엿한 한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순간이라면 이제 중년이 되고, 어른이 되고, 가정을 이루고자 마음먹었던 나의 소임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어가고 있다는 때가 될 것이다. 물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의 계획대로 될지 또 다른 고난을 걱정해야 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지만, 그때가 되면 내가 컨트롤할 시기가 지나버리게 된다. 이제는 그들의 고민과 문제가 될 것이다.
나 역시 내 부모의 그런 희생과 애씀의 결과로 이렇게 자랐다. 아마 나의 부모들도 이런 상실감과 외로움을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서운함은 당연한 과정이며, 세대를 거쳐 느끼게 되는 회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느낄 감정이며, 과정일지라도 조금 우울함은 어쩔 수 없다.
잘 자라주어 고맙다는 감사와 함께 더 이상의 내 존재가 가벼워지는 듯한 서운함과, 스스로 견뎌온 일들에 대견하면서도, 그로 인해 점차 움츠러들게 된 내 어깨의 작아짐이 딱하기도 하다. 나는 분명 열심히 살아왔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지 않은 부족함이 야속하기도 하다. 애썼기에 토닥이나, 보여주고 내줄 것이 없기에 스스로가 부끄럽다. 나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만족하다 하겠지만, 내 가족도, 내 자식도 나와 같은 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두렵다. 나는 참 부족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