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이 조용하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고, 아내는 출근했다. 집안에는 아직 아침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부엌 테이블에는 식사 후 급히 마무리한 흔적이 보이고, 거실에는 아이들이 벗어둔 양말이 굴러다닌다. 나는 습관처럼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정리한다. 이건 이제 내 하루의 일부다.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들을 챙겨 보내고, 집안을 정리하고, 저녁이 되면 다시 가족을 맞이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이 집에서 어떤 존재일까?"
아내는 대단한 사람이다. 세 아이를 낳고도 경력을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첫째를 임신했을 때, 나는 아내는 나의 이직에 떠밀려 본업에 복귀했고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사업을 확장했다. 셋째를 낳고 나서는, 거의 기계처럼 살아가는 것 같았다. 새벽까지 제안서를 쓰고, 아침이면 아이들을 챙겼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며, 아내는 사업에서도 인정받았고, 집에서도 중심이 되었다.
그 사이, 나는 자연스럽게 가정의 역할을 맡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내를 돕는다는 마음이었다. 육아를 분담하고, 집안일을 맡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돕는다'는 개념은 사라지고, 어느새 내가 집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내는 바빴고, 내가 아이들을 챙기는 게 더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내 역할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유치원에서 울던 아이를 달래고, 초등학교 입학식을 함께 가고, 학교 숙제를 봐주고, 다친 무릎에 약을 발라주는 역할. 그때는 내가 이 집에서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학원을 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린다. 예전에는 "아빠, 이거 봐줘"라고 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괜찮아, 나 혼자 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내가 모든 것을 너무 잘 해내고 있다.
그녀는 사업에서 성공을 거듭했고, 여전히 가정도 놓치지 않았다. 수입은 이미 오래전에 나보다 훨씬 많아졌다. 아이들의 교육 문제도 아내가 주도적으로 챙긴다. 나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중요한 결정들은 언제나 아내의 몫이었다. 학원을 정할 때도, 학교 행사에 참석할 때도, 아내가 먼저 움직인다. 나는 그저 "이번 주말에 무슨 일정 있어?"라고 묻고, 아내가 설명해주는 걸 듣는다.
한때는 이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점점 더 내 존재가 불분명해지는 기분이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사라져도 이 가정은 그대로 유지될까?"
아내가 돈을 벌고, 아이들은 스스로 잘 자란다. 집안일은 내가 맡고 있지만, 사실 내가 없어도 이 집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가사 도우미를 쓰면 되고, 식사는 배달을 시키면 된다. 나는 언제부턴가 점점 더 가벼운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다.
이 감정을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반응은 비슷하다.
"와이프가 돈도 잘 벌고, 너는 애들만 보면 되니까 좋겠다."
겉으로는 그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점점 더 무력해지고 있다. 나는 이 집의 기둥이 아니라, 그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가구처럼 느껴진다. 아내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는 예전처럼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예전에는 서로의 고민을 공유했고, 위로를 건넸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아내는 현장에서의 일들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거기에 낄 수 없다. 내가 회사를 떠난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의 일상을 이야기하지만, 아내는 때때로 피곤한 얼굴로 듣고 있다. 마치, 우리가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점점 대화가 맞지 않는 기분이다.
가끔은 짜증이 난다. 나는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바쁘다. 그런데 아무도 "수고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내는 사업에서 성과를 내면 보상을 받는다. 모두가 아내의 사업적인 성공을 축하하고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내게 "이번 주도 아이들 챙기느라 고생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가정에서의 노동은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가끔 아내를 바라보면 존경스럽다. 그리고 동시에, 부끄럽다. 나는 아내에게 의존하고 있는 걸까. 그동안 나는 아내의 성공을 응원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점점 더 작아지는 내 자신이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할까. 그런데 오랫동안 경력이 단절된 내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이도 많고, 경력도 끊겼고, 재취업은 쉽지 않다. 내가 지금부터 무언가를 해도, 아내의 수입을 따라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내 역할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대로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사라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늘도 고민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이, 언젠가는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