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는 희미한 조명이 켜져 있고, 딸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작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평소와는 달리 얼굴에 생기가 없었다.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손끝은 화면을 누르면서도 어딘가 둔해 보였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향하며 슬쩍 딸을 바라봤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평소 같으면 신나게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텐데, 오늘은 입을 꾹 다문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말을 걸어야 할까, 아니면 조용히 둬야 할까.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으며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딸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피곤해서."
목소리가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더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예전 같으면 “왜 그래? 뭔 일인데?” 하며 계속 캐물었겠지만, 요즘은 그러면 더 대화가 막히는 걸 알기에 가만히 두기로 했다.
"그래, 많이 피곤하면 밥 먹고 좀 쉬어."
나는 가볍게 말을 건네고 요리를 하며 기다렸다. 때로는 침묵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나서부터는 굳이 아이를 다그치지 않게 됐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딸이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빠, 있잖아."
나는 칼질을 멈추고 딸을 바라봤다. 딸은 살짝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오늘 학교에서 좀 짜증나는 일이 있었는데, 그냥 넘겨야 하나 싶어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딸의 이야기를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래서 네가 어떻게 했는데?" "그럴 땐 이렇게 해야지" 하며 해결책부터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이들은 해결책을 원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저 들어주길 바랄 때가 많다는 걸.
"그랬구나. 많이 속상했겠다."
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물을 한 잔 따르고 다시 물었다.
"네 생각엔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딸은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 그냥 좀 더 생각해 볼래."
나는 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식탁에 반찬을 놓았다. 이 순간 깨달았다.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전하면 잔소리가 될 수도 있고, 대화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릴 때는 아이가 울면 이유를 묻기 전에 먼저 품에 안았다. 작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흐느끼는 모습을 보면 이유가 무엇이든 일단 안심시켜 주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이가 힘들어하면 위로보다 해결책부터 내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가 어떻게 할 건데?" "그럴 때는 이렇게 해야지." 무심코 던지는 이런 말들이 딸의 표정을 더 굳어지게 만든다는 걸 알지 못했다.
부모는 언제나 아이가 더 좋은 방향으로 가길 바라기 때문에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조언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것이 때로 부담스럽거나 잔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부모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하더라도 아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말은 마음에 닿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더 닫혀버릴 수도 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부모가 먼저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지 않으면 아이는 듣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그 말이 전달되는 방식과 타이밍이다.
잔소리는 단순히 반복적인 말이 아니다. 아이가 듣고 싶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가 일방적으로 하는 말이다. 반면 대화는 아이가 마음을 열고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잔소리는 부모가 걱정과 조바심으로 하는 말이지만, 대화는 부모가 아이의 속도를 맞추며 듣는 말이다.
아이가 늦게 자면 피곤할까 봐 걱정되어 한마디 한다. 하지만 “이제 그만 자라”라고 하면 아이는 반발한다. 반면 “내일 아침 피곤하지 않겠어?”라고 하면 아이는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얻는다. 부모가 하는 말이 똑같아도 아이가 받아들이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들으면서도 동시에 생각한다. ‘이 말은 나를 위해 하는 말인가, 아니면 그냥 부모가 불안해서 하는 말인가?’ 아이들은 부모의 말투와 태도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래서 같은 조언이라도 잔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고, 따뜻한 격려로 들릴 수도 있다.
나는 딸이 조용히 식사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예전에는 부모란 아이의 삶을 이끌어주고, 방향을 정해주며, 해결책을 제시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아이는 이미 자신만의 생각과 판단이 있는 하나의 독립된 존재다. 부모는 삶의 모든 순간을 대신 결정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보며 조언을 건네는 가이드이자 관찰자에 가깝다.
어릴 때는 손을 잡고 길을 안내해야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는 한 걸음 물러나야 한다. 때로는 조언보다 기다려 주는 것이 더 필요할 때가 있다. 아이가 스스로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도록 지켜봐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이 아닐까 싶었다.
부모가 조급해하지 않을 때, 아이도 자신의 속도로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다. 잔소리와 대화의 차이는 결국 부모가 먼저 듣고 기다릴 수 있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같은 말이라도 조급함이 섞이면 잔소리가 되고, 한 걸음 물러서서 아이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면 대화가 된다.
나는 오늘 딸과의 대화를 통해 다시 한번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가 힘들어할 때, 당장 해결해 주고 싶고, 방향을 정해 주고 싶지만, 때로는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 그저 "그랬구나, 많이 속상했겠다" 한마디만 건네고 기다리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 더 깊은 신뢰를 주는 순간이다.
부모는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대신 아이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무언가를 선택할 때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언제든 옆에서 지켜봐 주고 있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잔소리는 때때로 부모가 불안해서, 조급해서 하는 말이지만, 대화는 아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다.
나는 딸을 바라보며 다시 다짐했다. 앞으로도 서두르지 말고, 답을 주지 않더라도, 아이가 스스로 길을 찾을 때까지 곁에서 묵묵히 기다려 주기로.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