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먼저 사과하면, 뭔가 좀 쿨해 보이지 않아?

by 성준

주말 아침, 거품이 가득한 개수대 앞에서 설거지를 하며 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기웃거리며 들어왔고, 커피 머신에서 풍겨오는 깊고 진한 향이 공간을 채웠다. 순간은 고요했고, 딸의 목소리는 그 평온함 위에 살짝 얹혀 흔들리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봄바람이 살랑이고, 커피 머신에서는 고소한 향이 퍼졌다. 딸은 어제 친구들과 있었던 일을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미묘한 흥분과 설렘이 섞여 있었고, 손짓까지 더해져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오후 일정, 처리해야 할 일, 밀린 서류들. 머릿속이 복잡했다. 설거지를 하면서 기계적으로 “응, 그래? 그렇구나”를 반복했다. 그러다 무심코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너는 맨날 쓸데없는 이야기만 하는 것 같다.”

그 말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딸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까까지 반짝이던 눈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 손을 멈추더니, 천천히 컵을 내려놓았다. 그 정적이 집 안을 채웠다.


나는 “아,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 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괜찮아”라는 짧은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거실 한복판에서 얼어붙었다. 손에 묻은 거품이 점점 마르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마른 것은 공기였다. 아까까지 가득했던 이야기의 온기가 사라지고, 방 안에 정적이 깃들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별것 아닌 한 마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그 말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도 실수를 한다. 하지만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어릴 땐 아이가 넘어지면 “괜찮아?”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이가 속상해할 때 “그럴 수도 있지. 그냥 넘겨”라고 말하는 내가 있었다. 부모라는 이유로, 실수를 덮고 가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 앞에서는 쉽게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왜 부모는 사과를 어려워할까?

사과를 하면 부모의 권위가 무너지는 걸까? 아이가 “봐봐, 아빠도 틀릴 때가 많잖아”라며 반항하는 계기가 될까? 아니면, 부모는 언제나 아이보다 경험이 많고 더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 때문일까? 어릴 땐 무조건 내 말이 맞다고 믿어주던 아이가, 이제는 내 실수를 정확히 지적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 사실이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아이들은 이미 부모의 실수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를 완벽한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무책임하게 변명하는 어른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가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들도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언제,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사과가 필요한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이 있다. 아이가 “핸드폰 좀 그만 봐”라는 말에 화를 냈다고 해서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가 감정적으로 상처를 주는 말을 했을 때, 혹은 아이의 감정을 무시했을 때는 사과해야 한다. 아이들은 그런 순간을 기억한다. 나도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부모의 말 중에서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 마디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는 것들이 있다.


나는 딸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고민했다. 당장 방문을 두드리고 “미안해”라고 하면 풀릴까? 아니면 잠시 시간을 두고 가만히 기다려야 할까? 고민 끝에 나는 천천히 딸의 방 앞에 섰다. 문을 노크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서 있었다.


잠시 후, 딸이 문을 살짝 열었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살짝 경계심이 스쳤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까 말, 너무 아무렇지 않게 했지. 미안해.”

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문을 조금 더 열더니 한 마디 했다.


“응, 이제 알았으면 됐어.”

문이 다시 닫혔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부모의 사과는 아이의 마음을 여는 열쇠다.

사과를 했다고 해서 부모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모가 잘못을 인정할수록, 아이는 더 부모를 신뢰하게 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늘 바른 행동을 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틀렸을 때는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운다. 우리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아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딸의 방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문 하나를 두고, 우주만큼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노크 한 번이면 닿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건 단순한 문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여는 문일지도 몰랐다. 부모의 역할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문 너머의 딸이 언젠가는 내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오늘 또 한 걸음 배우고 있었다.


나는 배워야 했다. 사과하는 법을, 기다리는 법을,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부모란 이름 뒤에 숨어 자존심을 세우는 게 아니라, 때로는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그러니까 나는, 조금 더 어른이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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