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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너는_그 후로 가족은

by 성준

동생은 어린시절부터 병을 앓았다. 제 1형 소아당뇨. 당연하게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 일을 감당해야 했다. 성준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고 익숙해질 무렵, 성준이는 곧잘 잠이 들곤 했다. 아니 잠이 든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정신을 놓는 경우가 많았다. 비틀거리다 픽 쓰러지거나 지친듯 기대어 잠이들거나 했다. 수시로 물을 찾았고, 이불에 실수를 하는 일도 잦았다. 11살 내 기억에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평소의 성준이의 모습은 부모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고, 작은 의원에서 부터 큰 병원 서울의 대학병원에 이르러야 우리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 때까지 우리 부모는 희망을 놓지 않았으리라. 오진일지 모른다는 나을 수 있다는 모든 희망을 가지고 더 큰 병원 더 큰병원을 찾아 서울까지 다다랐을 것이다.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을 찾아야 했다. 시골의 부모답게 우리는 모든 민간 요법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당뇨에 좋다는 많은 음식들을 시도했다. 모든 음식의 간이 사라졌다. 모든 음식은 환자식처럼 간이 없었다. 양념도 소금도 거의 없는 식단으로 하루를 채웠고, 어린 우리 형제는 곧잘 음식 투정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익숙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25년 가까이를 그런 음식으로 보냈다. 성준이를 보내고도 부모의 식단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소금기 없는 음식을 드신다. 그런 음식이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성준이를 보내고 맛있는 음식을 드시는 것이 죄스러웠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느 날..


성준이를 보내고 십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성준이에 대해 가끔 대화를 나눈다. 그 십년 동안은 서로 성준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적이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는 내 어린 시절의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명절에 모여 어머니께 앨범을 물었다.


앨범은 없었다.


흔적들이 상처가 되어 차마 꺼내 보내지 못한 앨범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렸다. 내심 내 어린 시절의 사진들이 아쉽기는 했지만, 누군가 말했다. 반려자를 잃고, 부모를 잃은 사람을 부르는 말은 있지만 자식을 먼저 보낸 이들을 지칭하는 말은 없노라고. 어떤 단어로도 그 아픔과 슬픔과 상실감을 정의할 단어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형제를 잃었지만, 부모는 자식을 잃었다. 어머니는 열달을 품어온 분신같은 아들을 잃은 것이다. 나의 슬픔이 가장 아픈 것이라 생각했지만, 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보다 더 깊고, 어두운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이가 있던 것이다. 나는 그 뒤로 앨범을 찾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성준이의 사진이 없다.


그 일을 계기로 가끔 어머니와 성준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내 어머니는 말하셨다.


"성준이가 가고 나서 편해진 것도 있어. 이제 더 이상 조마조마 하며 살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편해 진것도 있어. 그 전에는 일부러 잘 웃지도 않았어. 웃고, 즐겁게 있다보면 순간 순간 내가 지금 이래도 되나 싶은 돌댕이가 가슴에 콱 막혀. 그래서 여행도 안가고 모임도 안나갔어. 지금도 그래. 자식 먼저 보내고 내가 웃으며 살아도 되는지 모를때가 있어. 그래도 이제는 많이 나아진거야. 지금은"


몰랐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덜 걱정했고, 덜 신경쓰였다. 막연히 잘 살고 있겠지. 스스로 알아서 하겠지. 않좋은 일이 생겨도 성준이가 택한 삶이다. 스스로 책임져야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나는 형제를 잃고 아프다. 여기며 살아 왔지만 정말 상처입고, 힘들었던 사람은 내가 아이었던 거였다.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성준이가 세상을 떠나던 때 아내는 둘째를 뱃속에 품고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내는 울지도 못한 채 동생의 관을 지켜보았다


동생의 49재를 치르고 일주일 쯤 지나 둘째가 태어났다. 나의 세 아이들 중 삼촌의 얼굴을 직접 본 아이는 큰아이 밖에 없다. 그 큰 아이도 삼촌을 기억하지 못한다. 겨우 4살의 나이. 겨우 36개월을 지난 아이라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만, 아이들이 삼촌을 기억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는 것이 내심 아쉽고 서러웠다.


너희들에게도 이런 삼촌이 있었다 말해주고 싶지만, 아직 내게도 동생의 이야기는 상처다. 머리속에, 가슴속에 몽글몽글 살아있는 기억과 추억들도 입 밖으로 나오면 뾰족한 가시가 되어 상처를 낸다. 뱉어 내기가 힘들다. 십년이 지난 지금도 아이들은 아빠의 형제가 있었는지 어렴풋이 알 뿐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억한다.

성준이의 첫 조카가 아장 아장 걸으며 온갖 예쁨을 뽐내던 때 였다. 뜬금없이 매장에 찾아왔다. 어디선가 제 몸보다 더 큰 박스를 낑낑거리며 찾아왔다. 첫 선물이었다. 원목으로 된 주방 놀이 세트를 가지고 와서는 아이 앞에서 들 뜬 표정으로 조립까지 해주었다. 그렇게 30여분을 낑낑 거리며 조립하고는 툭 아이 앞에 내밀고, 어떻게 놇아주어야 하는지 모르니 그저 아이가 가지고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함께 놀지도 못하고, 내가 사주었다고 생색을 내지도 못하면서 노는 아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 얼굴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큰 아이는 기억도 못하지만..나는 잊지 못한다.


그 원목 장난감은 성준이가 떠나고 몇년이 지나도록 버리지를 못했다. 내 아이들에게 해준 유일한 선물이어서 그랬을까? 조카를 바라보는 눈빛이 눈에 밟혀서 그랬을까? 근 십년을 보관하다 얼마전에야 처분하게 되었다. 솔직히 아직도 나는 성준이의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다. 성준이는 멋진 청바지를 좋아했다. 월급의 꽤 큰 부분을 옷사는데 소비했던 성준이는 꽤나 폼나는 청바지를 남겼다. 그 갯수도 열벌이 넘어간다. 어깨는 나보다 넒은 주제에 허리는 또 나보다 가늘어 나는 입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 청바지를 가지고 있다. 계절을 보내며 옷장을 정리하다보면 툭 하고 나오는 청바지를 보고, 올해는 정리해야지.. 올해는 정리 해야지 하면서 아직 보내지 못한다. 옷이 아까운 것인지 흔적이 아까운 것인지 추억이 아쉬운 것인지 나도 잘 모른다. 사진도 없고. 기억만 남은 내게 그 옷들이 내게 남은 몇 안되는 증거인 셈이다. 청바지는 옷장의 가장 안쪽, 같은 계절이 열 번쯤 바뀌는 동안에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손에 쥐면 먼지가 묻고, 마음에 쥐면 눈물이 묻는다.


우리는 다들 그렇게
떠나보내고 있었다.

누구도 다 보내지 못했고,

누구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매일, 하루치의 이별을 견디며

너 없는 삶에 익숙해지는 법을
서툴게 연습하고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너를 기억하고,
또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부디,
그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가볍고 따뜻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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