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월호가 가라 앉던 해 동생을 잃었다. 동생은 한강 어딘가에서 깊은 어둠에 빠졌다. 한동안은 한강이 꼴도 보기 싫었다. 드라마에나 영화에 나오는 한강도 싫었다. 한강에서 여가를 즐기고 데이트를 즐기는 모습이 싫었다. 내 슬픔이 누군가의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아니 우리는 서로 같은 대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걸, 나는 받아 들이지 못했다. 그냥 한강이 싫었다.
아내는 가끔 나에게 말한다. 꽃이라도 한 송이 띄우고 오자고.
나는 말 없이 고개를 젖곤 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이제 겨우 납골당을 찾아가는 정도인 내가 한강을 마주 할 용기가 없었다. 일 때문에 서울을 갈 때면 햇살에 예쁘게도 빛나는 한강의 윤슬이 그렇게도 싫었다. 잔잔한 물결에 햇살이 예쁘게도 부서지는 모습이 예뻐서 싫었다.
보기만해도 몸서리 쳐지고, 눈을 돌리고 싶어져야 하는데 속절없이 예쁘기에 더 싫었다. 한강이 예뻐 눈을 뗄 수가 없어 싫었다. 차를 몰고 지나는 강변 북로며 올림픽대로에서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뺏기는 한강이 싫었다. 한강의 여전히도 예뻤고, 나는 그 모습에 더 슬퍼졌다. 모든 걸 집어삼킨 강이 빛난다는 사실이, 세상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러간다는 사실이, 너무도 잔인했다
한강이 무슨 죄가 있을까.
동생이 한강에서 생을 끝내버린 최초의 사람도 아니다. 오래도록 한강은 누군가의 마지막 장소이기도 해왔고, 그동안의 그런 일들은 나에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한강을 그저 예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데이트를 해왔고, 젊음을 꿈꾸었으며, 미래를 그리던 그런 빛나는 장소였었다. 그저 내 삶의 이야기가 하나 늘어나 한강이 밉쌀맞게 보일 뿐이었다. 한강은 아무런 죄가 없다.
어느 날엔가 강변 북로가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일이 생겼다. 한 달 반을 그곳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은 밤섬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밤섬. 여의도 옆쪽으로 선유도 근처에 무인도인 밤섬이 있다. 밤섬은 성준이가 누워있던 곳이었다. 아니 성준이가 발견된 곳이었다. 그곳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지 나도 모른다. 그저 서류상에 밤섬에서 발견되었음을 나타내는 문구가 있었을 뿐. 당시 정확한 지점을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사실 그것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 밤섬을 하루종일 바라보며, 일을 했다. 밤섬에 때로는 햇살이 들고, 때로는 구름이, 비가 , 안개가 드리우곤 했다. 그곳을 바라보다보면 저어기 어느 곳에선가 누워있을 그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추웠겠다. 차가웠겠다. 그저 상상해보곤 우울해 했다. 한 달반을 밤섬을 내려다 보며, 못 견디리라 생각했지만 나는 그 시간을 보냈다. 그저 똑같은 일상처럼 시간은 지나갔고, 나는 그 시간을 견뎠다. 그 공간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밤섬은 그 시간은 그저 일상이고, 풍경이었을 뿐 나 홀로 느끼고 겪는 불편함이었을 테다.
나만 겪는 일인줄 알았고, 나만 아픔을 겪었다 생각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우리 부모에게만 찾아온 무고한 형벌처럼 억울해도 했었다. 나는 주변에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고통은 내게 스쳐지나가는 그저 다른 날과 같은 일상이었다. 누구도 그 일을 겪지 전까지는 아무 관련 없는 일중의 에피소드인지 모른다.
큰처형이 아팠다. 암 수술을 마치고 완치를 의미하는 오년의 시간이 다다를 무렵 다시 병원으로 입원을 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나만 겪는 아픔이라 여겼던 상실이 아내에게도 찾아왔다. 일상에 다반사와 같은 상실을 나는 그동안 애써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나에게만 오는 불행이라 여겼던 아픔도 모두가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무게가 조금은 가볍게 느껴진다. 타인의 절망과 슬픔에 나의 아픔이 함께 녹아들며 그 색이 희미해 진다. 모르는 사이에 상실은 삶의 한 정거장쯤으로 가벼워진다. 세상 가장 깊은 심해라 여겼던 감정도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무릎밖에 오지 않는 실개천이 된다. 그 심해에 혼자 가라앉았다 여겼던 순간도 세상 모두 한발 쯤은 발을 담그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와 나는 어느새 형제를 먼저 보냈다는 공통분모를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과정이 어찌되었든 저마다의 우주 하나를 가슴에 품고 살게 되었다. 서로는 알고 있다. 서로의 상실감이 어떤 정도인지 설명하고, 묘사하지 않아도 상처와 후회와 애닮픔을 알고 있다. 또 하나의 교집합이 생겼다. 영원히 이해받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외로움도 나의 그것이 아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누구나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똑같은 위로의 말도 나와 같은 경험을 지닌 사람의 말이 더 무겁다 느껴진다. 어떤 화려하고, 애정어린, 진심이 담겨있는 위로와 응원도 나와 같은 경험의 유무를 확인하고서야 조금 열린 틈으로 비집고 자리잡는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상실감에 대해서 크게 이야기 나누지 않는다. 그저 그런 상실감을 더 이상 반복하기 싫어 주변을 살피고, 안부를 묻고, 건강을 챙긴다. 미리 대비한다고 준비할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관심을 쏟는 것은 좀 더 쉽게 극복하기 위함이 아니다. 상실뒤에 따라올 후회와 미련과 애잔함을 대비하는 것 뿐이다.
타인에게 나는 그저 가족을 먼저 보낸 사람이며, 힘들었으리라 상상하는 그런 정도의 타인이다. 그 일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기에 언젠가는 나의 아픔을 고스란히 경험하게 될 사람이기도 하다. 너도 경험하리라는 저주가 아니다. 일어날 일이며, 겪어야 할 성장통임을 먼저 겪은 것 뿐이다.
외할머니는 아들을 먼저 보냈고, 그 딸도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어떤 팔자이기에 자식 앞세워 보내야 하는지 팔자가 무섭지만, 이는 팔자 소관도 아니고,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일어난 일이 뿐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삶을 버티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는지도 모른다. 타인을 원망하고, 스스로를 원망해도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타인을 저주하고 원망하고 미워해 그 일을 되돌릴 수 있다면 세상 모든 사람을 원망할 수도 있다. 세상 모두를 등진다해도 성준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일 아닌듯 살아간다는 포기가 아니다. 망각도 아니다. 밤섬을 밤낮으로 쳐다보고 노려보아도, 저주하고 원망하여도 달라지지 않았다. 성준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의 구멍난 가슴은 채워지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지만, 조금 비어 버렸지만 나는 그대로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밤섬이 밤섬인채로.
한강이 한강인채로.
그리우면 그리운데로.
보고싶으면 보고 싶은데로.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 그 뿐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묻었고, 또 다른 자식이 그의 자식을 묻은 것도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일들이었을 뿐이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야 할 그런 일인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