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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an 16. 2020

정상적인 우리 사회가 해체한 '어느 가족'

영화 <어느 가족> 후기 (2018)


영화 <어느 가족>의 원제는 <万引き家族> 이다.

'만비키 가조크' 즉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어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어느 가족, 영화가 보여 주는 그 '어느 가족'은 완벽한 유대감과 사랑을 지닌 가족, 그래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가족이다. 천국보다 낯설어 보이는 이런 가족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아마 '어느'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어느 비 갠 날, 어느 여름밤' 처럼.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한겨울 어느 날  '類似 아빠' 오사무와 어린 '類似 아들' 쇼타가 대형 수퍼마켓에서 '만비키'를 마치고 고로케를 사서 나눠 먹으며 돌아오다가  동네 어귀 어느 집 1층 난간에서 떨고 있는 어린 소녀 '린'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고로케를 나눠주고 린을 집으로 데려 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 가족의 집에서 어린 린은 '類似 외할머니' 하츠에, '類似 엄마' 노부요, '類似 이모'  아키를 만나게 된다. 가족은 아빠와 어린 아들이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린을 맞아 들인다. 린의 몸에 난 상처를 찬찬히 살펴보던 할머니는 린에게 '할머니처럼' 말을 건네고 나머지 가족들도  놀라지 않고 린에 대해 짐작한다. 어린 아들 쇼타도 몇가지 일상을 거치고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린을 여동생으로 받아들인다. 엄마 노부요는 린을 데리고 목욕을 하다가 서로의 팔에 난 상처를 어루만진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스러운 장면 중 하나가 나온다.      


엄마는 린의 머리를 다듬어주고 훔쳐온 새 옷을 입힌 후 린을 무릎에 앉히고 린이 집에 올 때 입었던 옷을 태운다. 엄마는 린을 껴안아 주며 그 불꽃을 같이 바라본다. 그리고 "사랑하면 때리지 말아야 해, 이렇게 꼬옥 안아주어야 해" 라고 린과 자신에게 말해준다. 카메라는  모녀의 껴안은 모습을 정면으로 한없이 클로즈업하고 엄마는 눈물을 보인다. 이렇게 여섯 명의 '어느 가족'이 완성된다


영화의 두 번째 부분은

이제 이 가족들이 함께 지내는 모습이다.


사실 이들은 血緣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아니다. 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누군가가 버린 사람들, 그래서 버려진 사람들이 그냥 모여서 같이 살면서 서로 부양하고 있을 뿐이다. 법적으로 독거노인인 할머니의 연금, 일용직 노동자인 아빠와 세탁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인 엄마의 하찮은 수입, 유사성행위 업소에서 일하는 이모, 그리고 학교를 다니지 않는 어린 아들과 이제 막 가족으로 들어온 어린 딸까지 동원된 아빠의 '만비키'로 이들은 생활한다. 이들은 서로를 아저씨나 아줌마로 부를 뿐 아빠나 엄마로 부르지 않는다. 서로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기대할 뿐이다.


영화는 이들 일상의 소소한 대화를 일체의 배경음악 없이 계속 들려준다. 할머니가 딸 그리고 손주와 나누는 대화, 장모와 사위의 대화, 부부간의 대화, 이제는 성인이 된 자매간의 대화, 형부와 처제가 나누는 대화, 어린 남매가 나누는 대화, 아빠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 그리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거나 떠들면서 다같이 나누는 전혀 특별한 것 없는 대화.


이들 가족은 한여름 해수욕도 같이 다녀오고 건물들로 둘러싸인 좁은 집의 마루에 모여 앉아 소리만 들리는 불꽃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한 여름 어린 남매는 매미를 잡으러 동네를 돌아다닌다. 여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오빠, 뒤따라 뛰어가는 여동생, 잡은 매미를 허름한 웃옷에 붙이고 재미있어 하는 남매의 모습. 그리고 할머니는 세상을 떠난다. 가족들은 할머니를 그냥 집 안에 묻고 지낸다. 할머니의 연금은 계속 나온다.


이제 영화는 마지막 부분으로 접어든다.


사실 이 가족이 보여주는 잔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처음부터 불안감을 수반한다.  두 시간 정도 분량의 영화 어느 지점에서 '어느 가족'은 필경 파경을 맞을 텐데 라는 불안감은 이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더욱 커진다.


어린 남매는 '만비키'를 하다가 결국 발각되고 아들 쇼타는 쫓기다가 부상을 당하고 체포된다. 경찰이 개입하게 되고 아들 쇼타를 버리고 야반도주하려던 가족들도 체포되면서 언론이 개입한다. 가족은 절도, 유괴, 사체유기, 연금횡령이라는 피의자 신분 혹은 보호 대상으로 전환되고 조사를 받게 된다.  


'어느 가족'의 해체,
정상적인 우리 사회의 법과 질서는 
이들을 해체한다.


이제 피조사자 신분의 가족은 각자 별도의 조사실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앉아서 조사자의 질문에 대답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조사를 받는 이들은 모두 ‘어느 가족’으로 살았던 시절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그냥 다른 사람은 어떻게 말했는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탐색하듯이 되묻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나 꿈 속 우리가 진짜 가족이었나를 생각해 보듯이. 가족은 그렇게 처분되어 해체된다.


쓸쓸한 결말을 맺은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정상적인 우리 사회가 해체하고 엄마 노부타의 말처럼 “역부족”이라서 지켜내지 못한 ‘어느 가족’이 보여준 깊은 유대감과 사랑 그리고 끊임없는 교감이 그냥 血緣으로만 이어진 가족보다 이들을 더 가족처럼 느껴지게 하지 않느냐고


그리고 蛇足, 어느 가족의 어른들은 모두 본명이 있지만 가명을 쓰면서 하츠에 시바타 할머니를 따라 '시바타'라는 姓을 사용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들 쇼타는 아빠 오사무의 본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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