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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an 16. 2020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혹은 ‘살아야 하는가'

영화 <기생충> 후기 (2019)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혹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己亥年 유월 일곱째 날 往十里에서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그리고 열흘 남짓 지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엔차 관람러가 된 것이다. 영화를 본 지 어느덧 반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다가올 앞날은 알 길 없고 기억은 흐려지니 <기생충>을 본 후 떠올랐던 ‘오만 가지’ 잡스러운 생각들 중 몇 가지를 기록으로 남긴다.


누가 罪人인가?


半지하에 살고 있는 ‘기택-충숙-기우-기정’은 罪人이 맞다. 정확하게 말하면 법규범을 심각하게 위반한 Criminal이다. 문서위조, 사기, 살인죄를 저지른 명백한 범법자이다. 비난받아 마땅하고 결국 그 일이 벌어진 날 딸 기정은 세상을 떠났고 아들 기우와 엄마 충숙은 법의 판결을 받았다. 살인죄를 범한 아버지 기택은 ‘半지하’ 보다 더 깊숙한 地下로 숨어들어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켰다.


하지만 그들 ‘半지하 사람들’에게 그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넘어 도덕적 비난까지 퍼붓는 것은 불편하다. 어떤 이는 그들에게 세상을 어지럽힌 책임을 물어 법의 엄정함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면책사유 혹은 감경사유라도 찾아 주고 싶은 마음이다.


지상 높은 곳에 살고 있는 박 대표 가족도 罪人이다. 우리가 오랜 세월 잊고 지내며 둔감해진 가치 혹은 판단기준이긴 하지만 그들은 도덕적, 윤리적 죄를 지은 Sinner이다. 박 대표와 아내 연교는, 半지하 사람들을 ‘같은 세상에서 같이 살고 있는 같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다. 무리한 요구는 금전으로 보상하면 되는 ‘근무의 연장’으로 간주되었고 또한 절대로 ‘線’을 넘지 말 것을 소리 없이 강하게 압박했다. 심지어 냄새 조차 ‘線’을 넘지 말아야 한다.


‘半지하 사람들’은 無色-無臭-無念한 투명인간이었다.
'사람은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어느 가족이야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을 보고 ‘정상적인 우리 사회가 해체하거나 역부족으로 지켜내지 못한 어느 가족의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깊은 유대감과 사랑을 지닌 가족, 그래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가족을 나는 영화 <기생충>에서도 만난 듯하다.


半지하 가족은 자주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같이 밥을 먹고 술자리를 갖는다. 취객이 방뇨하며 소리 지르는 초라한 창 밖, 바른말 고운 말은 아니지만 온 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거리며’ 범죄를 모의하고 막장드라마도 보여 주고 선뜻 수용하긴 힘들어도 재미있긴 한 궤변을 늘어놓는다. 어찌할거나, 누가 감히 半지하 가족이 보여주는 심오한 가족 케미를 부인할 수 있을까?


半지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변기 - 참으로 상징적이다 -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한 자락의 가냘픈 와이파이를 검색하는 기우-기정 남매의 다정하고 참한 모습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한없이 무능하고 비굴하고 현실 순응적인 아버지 기택, 그런 아버지 곁을 지키는 아들 기우, 딱 봐도 가정경제의 실질 운영자 엄마 충숙, 그리고 뭘 해도 예쁜 딸 기정. 어쩌면 ‘정상적인 중산층에서 밀려나 이제는 半지하로 내려와’ 삶을 이어가고 있는 그들이 ‘천국보다 낯설어 보이는 깊은 유대감과 사랑’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채업자의 사시미 칼날을 피해 지하로 숨어든 ‘문광-근세’ 夫婦는 별개로 하더라도 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박 대표 가족이 함께 밥 먹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박 대표는 수행 운전기사로 잠입한 기택에게 “어디 갈비찜 잘하는 곳 아는데 없느냐?” 고 물어본다. 아내 연교가 요리를 잘 못하면 포장이나 배달을 시켜 온 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거리며’ 같이 먹어도 좋으련만 가족과 함께 밥 먹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트집을 잡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근사한 가족의 근사한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맡은 바 역할을 차질 없이 수행하는 것뿐이라고 해석한다면 너무 편파적인가?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地下 ‘半地下 투쟁 그리고 희망의 부재


이 영화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근세의 출현’이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쫓겨난 문광의 얼굴이 박 대표 집 인터폰 화면에 떠오르자 관객들은 예상했던 흐름이 지연되거나 혹은 살짝 어긋나는가 하는 정도의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숨겨진 지하방공호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곳에 ‘기생’하고 있는 ‘근세’가 등장하자 관객들은 일체의 전망과 분석을 포기하고 속절없이 영화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버린다. 정말이지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이다.


관객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박 대표 가족에게 기생하던 그들 ‘半地下와 地下의 갈등’이 아무런 희망의 단서도 남기지 않고 곧바로 공멸로 내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택은 근세가 살고 있던 지하 방공호로 숨어들어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자신만의 安息을 확보하고, 기택의 딸 기정과 문광-근세 夫婦 그리고 박 대표는 모두 살해당해 세상을 떠나버린다. 박대표의 유족들은 그 후 소식을 알 길 없고 지상에 살아남은 충숙-기우 母子는 또다시 어느 半地下에서 살게 된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장면은 박 대표 저택의 지하방공호에 살게 된 아버지 기택과 半地下에 사는 아들 기우가 나누는 대화이다. 아버지는 모스부호로 아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아들은 깜박거리는 전등에서 그 신호를 판독한다. 그리고 아들은 박 대표의 저택을 사들여 아버지를 구하겠노라고 다짐하며 응답 메시지를 전송한다. 하지만 그 응답은 방백으로 처리된다. 아들은 도대체 얼마를 벌어야 그 저택을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지상의 누구도 그들의 절망적이고 슬픈 교신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냥 고장난 전등으로 인식할 뿐이다. 이 얼마나 슬프고 절망적인가?


단테가 神曲에서 말하길 地獄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슬픔의 나라로 가려는 자는 나를 지나라’, ‘나를 지나고자 하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살아 남아 다시 地下와 半地下에 머물고 있는 기택-기우-충숙은 깊은 슬픔 속에서 희망 없이 살고 있으니, 그들은 비록 살아남았으나 이미 地獄門을 지난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後記 혹은 蛇足


영화를 본 직후 나는 이 영화에 대한 도상학적 해석에 골몰한 적이 있다. 반년 정도 지난 지금 돌이켜 보니 당시의 그런 유희적 해석들은 모두 부질없이 사라지고 한 가지 생각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영화의 장면과 장면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표면적인 현상들의 직설적인 의미. 즉 그런 구조가 있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관계를 맺으며 갈등이 잉태되고 폭발하면서 상황은 극단으로 흘러, 죽은 이들은 평화의 안식을 얻지 못하고 살아남은 이들도 地獄門을 지나게 되는 결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아니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외벽면 부조, 奏樂飛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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